진흥회 상임회장 김완희
1976년 출범한 한국전자공업진흥회는 1978년 말까지 2년여 동안은 금성사의 박승찬 사장이 이끄는 비상근 회장 체제로 운영됐다. 업계 1위이며 맏형격인 금성사의 대표가 회장을 맡게 되는 모양새는 일단은 대정부 로비 등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수출지상주의와 목표 달성위주의 경제정책을 펴고 있던 정부 입장은 달랐다. 전자산업을 관할하는 상공부로서도 산하 민간 단체들이 각종 정부 시책들을 일사불란하게 따라주기를 원했다. 진흥회 역시 민간기업체 대표가 이끄는 비상근 회장 체제보다는 정부가 내정한 상근 회장체제로 개편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구상은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청와대 경제비서관들로부터 나왔다.
미국 컬럼비아대 공과대학 교수 김완희가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상근 회장으로 지목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비서관들은 김완희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1978년 11월 어느 날 오원철 경제수석은 김완희를 청와대로 불러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김 박사, 그 동안 3개 연구소의 고문으로 정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김정렴 비서실장과 의논했는데, 이제 진흥회 회장을 직접 맡았으면 합니다.』
오 수석은 미국처럼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이 상임 회장을 맡게 되면 모든 사업을 공정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한국정밀기기센터(FIC)도 곧 진흥회에 흡수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박승찬 사장에게는 그런 구상을 이미 전달하고 퇴진을 요청했다고 했다.
김완희는 이때의 심정을 최근 펴낸 자전에세이 「두개의 해를 품에 안고」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나는 그것이 박 대통령의 뜻이라고 짐작했다. 오원철 수석이 단독으로 그런 제안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겠다고 말하고 오 수석 방을 나왔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컬럼비아대학을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에게 조언을 청하자, 업계나 정부측 인사들은 한결같이 전자공업의 기초를 만든 내가 진흥회를 맡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다음날 박승찬 사장이 와서 진흥회에서는 청와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고 말하며 추진하고 있던 사업과 관련된 서류를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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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 끝에 나는 2년 정도만 진흥회 회장을 맡기로 했다. 대신 컬럼비아대학으로부터 2년간 휴직을 받아내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박승찬이 김완희를 찾은 다음날 긴급 소집된 진흥회 총회에서는 비상근 회장 체제를 정관을 개정해 상근 회장 선출을 만장 일치로 통과시켰다. 1978년 12월 5일 김완희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상근 회장과 전자공업협동조합 상근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한국인 최초의 컬럼비아대학 교수 출신으로서 1967년 9월 청와대에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를 제출하며 정부 요로와 전자업계에 그 이름을 알렸던 김완희가 마침내 업계 전면에 등장한 것이었다.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상근 회장으로서 김완희의 등장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우선 김완희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 신임을 바탕으로 여러 민간 조직들을 흡수 통합하여 진흥회를 정책부처(상공부)와 민간기업을 연결시켜주는 강력한 단일 교량기구로 격상시켰다. 이때 진흥회에 흡수 통합된 기구들 가운데 대표적인 곳들로 FIC의 전자공업진흥관련조직과 사단법인 한국전기용품제조협회 등이다.
예비역장성 이춘화(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역임)가 이끌던 FIC의 경우 수출진흥과 해외시장개척 업무 등 진흥업무와 한국전자전(KES), 정밀도 경진대회, 정밀기능사경진대회 등 전시사업을 모두 진흥회로 넘겼다.
김완희의 영향력은 진흥회 회장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까지 그의 직함은 전자공업협동조합과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이사장, 한국전기통신연구소와 한국전기연구소 이사 등 무려 17개나 됐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대부분이 직간접으로 그의 영향권 내에 들어간 셈이었다.
김완희 체제로 개편되면서 진흥회는 회원사로 금성사·삼성전자·아남산업·대우전자·인텔 등을 위시하여 400여 개가 넘었다. 대통령의 의지를 꿰뚫어 보고 있다고 판단한 김완희가 주력한 것은 역시 수출이었다.
김완희 회장 체제가 되면서 진흥회는 기존 FIC가 해오던 수출진흥과 해외시장개척 업무를 한층 강화하는 방편으로써 수출물량과 여신을 배정하기 위해 각 업체들을 정밀실사에 착수했다. 수출을 희망하는 업체들을 대상으로 자본력·생산력·기술력 그리고 과거 수출액 등을 조사해서 일종의 순위를 매기는 작업이었다.
1978년의 조사에서 업계 1위는 예상대로 금성사였고 2위는 삼성전자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듬해 삼성전자가 이 순위를 뒤집었다. 맏형격인 금성사로서는 기업으로서 자존심과 시장 영향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수출 물량에 따라 엄청난 정부 특혜가 주어지던 시절이어서 재정적으로도 큰 손실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금성사 측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엄청난 물량의 대 언론 광고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도 이에 뒤질세라 맞불 작전으로 나왔다. 얼마나 광고전이 치열했던지 상공부 차관이 두 회사 대표를 불러 자숙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업계는 이 광고전을 계기로 비로소 내수시장의 폭발적 확대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내수확대를 위해 진흥회가 정부측에 밀어붙인 것은 특별소비세 인하와 컬러TV방송의 즉각 방영 두 가지였다. 이 가운데 컬러TV방송의 즉각 방영은 지난 호 「TV전쟁」에서 설명했듯이 박 대통령의 반대로 1980년 12월에서야 실현을 보았지만 그 효과는 컸다. 무엇보다도 컬러TV의 제조는 흑백TV보다 관련부품이 3배나 많이 소요돼 업계 부양효과나 시장창출효과가 만만치 않았다.
1979년 당시 가전제품은 대부분이 사치품으로 분류돼 TV의 경우는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특소세가 35%나 됐다. 진흥회 측은 이 점이 바로 업계의 채산성 악화의 주된 요인이라는 점을 집중 부각시켰다. 김완희는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 허준구 금성사 사장, 조동식 동원전자(인켈의 전신) 사장, 김향수 아남산업사장 등 업계 대표들을 대동하고 청와대·총리실·경제기획원장관·재무부장관·관세청장 등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이 결과 특소세율을 15%까지 인하시키는 데 성공했다.
물론 한국전자공업진흥회가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완희의 강력한 리더십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공부는 진흥회가 상근 회장 체제로 개편되기 5달 전인 1978년 7월 기존의 중공업국을 폐지하고 전기전자공업국을 신설하는 등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전기전자공업국은 전자산업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의 기구로서는 최초의 국단위 조직이었다.
1977년 말까지 정부 부처에서 전자 전기 분야를 담당하던 곳으로 상공부의 전기공업과가 가장 위상이 높은 조직이었다. 1964년 발족된 전기공업과는 공업 제2국 소속이었으나 1973년 개편 때 중공업국 소속이 됐다.
1978년 1월 개편 때 상공부는 전기공업과를 중전기기과로 명칭을 바꾸면서 전자기기과, 가전제품과, 전자부품과를 신설했다. 비로소 각 전자전기 분야를 특성상으로 분류하여 거기에 맞는 정책을 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1978년 7월 상공부는 다시 중공업국을 폐지하고 중전기기과, 전자기기과, 가전제품과, 전자부품과를 모아 전자전기공업국을 신설했다.(참고로 전기전자공업국은 1981년 전자공업진흥법이 개정되면서 정보기기과가 신설되고 전자기기과가 전자정책과로 이름이 바뀌면서 국 전체업무를 총괄하게 된다)
한국전자공업진흥회를 상근 회장 체제로 개편한 것은 결국 전기전자공업국의 정책 실천기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진흥회는 사실상 민간기업들을 통제하는 정부의 대리기구 성격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진흥회의 모든 업무와 예산 심지어 인사관련 업무까지도 전기전자공업국장이 지시하고 인준했다. 물론 이런 상황은 상공부와 한국전자공업진흥회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이 당시 각 부처 산하단체 가운데서 진흥회나 조합이라는 명칭이 붙는 민간조직들 대부분은 이런 범주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정부가 산하 진흥단체들을 통해 민간기업들을 통제하는데 활용했던 대표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앞서 언급했던 수출물량 및 여신 배정권이었다. 70∼80년대 정부는 이 같은 막강한 권한을 진흥조직들에 부여함으로써 외견상으로는 민간자율의지에 의한 수출진흥활동을 펴도록 하는 정책을 집행해 왔던 것이다.
서현진기자 jsu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