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20세기가 저물어진다. 지난 100년은 인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역사가들은 20세기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지난 세기는 "파괴와 살상의 시대"였나하면 "창조와 변혁의 시대"로 비치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전자.정보통신분야의 눈부신 발전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기술혁명은 끊임없이 새로운 키워드들을 만들어냈다. 새 천년을 앞두고 지난 100년 동안의 전자.정보통신분야 키워드를 정리해봤다.
편집자주
19세기 말, 사람들은 다가올 20세기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TV와 컴퓨터, 멀티미디어, 인터넷, 사이버 같은 단어를 떠올린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20세기의 새벽은 무선통신과 함께 열렸다. 이탈리아의 마르코니는 1901년 세계최초로 무선신호를 수천 킬로 떨어진 대서양 건너편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전혀 새로운 광선인 X선이 발견된 해였고, 라이트 형제에 앞서 페르디난트 체펠린이 비행선을 타고 유럽하늘을 날던 바로 그 해였다.
이렇게 출발한 20세기를 장식한 첫 번째 키워드는 전자였다. 전자는 곧바로 진공관을 낳았고 진공관은 전자공학 시대를 향해 신호탄을 쏘았다. 20세기라는 시간의 트랙을 따라 진공관은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를 거쳐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진화하면서 전자공학기술을 꽃피웠다.
진공관을 하나의 회로로 대체한 트랜지스터는 반도체시대를 향해 가는 또다른 방향키였다. 후에 값싼 실리콘으로 트랜지스터가 만들어지고, 기판 하나에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IC가 등장하면서 전자제품은 점점 작아져 보통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됐다.
벨이 전화기를 발명한 것은 19세기지만 전화기가 가정에 보급된 것은 20세기 이후다. 전화는 값싸고 편리한 일대일 양방향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자리잡았다.
30년대 인류는 TV라는 전혀 새로운 문화체험을 하게 된다. TV는 일방향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눈과 귀를 무한히 확장시켰다. 바보상자라고 불릴 만큼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면서 TV는 인터넷에 앞서 글로벌시대를 열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 본격화한 TV의 문화습격은 지구촌을 한 울타리로 만들었다.
컴퓨터의 발명은 20세기를 뒤흔든 최대사건 중 하나다. 집채만한 덩치와 30톤의 무게가 나갔던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이 1946년 등장했다.
인공위성은 50년대의 키워드였다. 1957년 소련의 과학연구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쏘아 올려졌고 다음 해 미국은 익스플로러 1호로 반격을 가했다. 냉전의 산물인 인공위성은 과학기술 발전의 촉매가 됐다.
70년대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1971년 개발된 인텔 4004. 4비트짜리 이 작은 칩이 반도체와 PC 혁명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됐다.
80년대를 지배한 키워드는 PC와 정보화였다. PC는 대학 연구소, 산업현장에 머물렀던 컴퓨터를 대중에게 보급시켰다. 컴퓨터는 정보혁명의 중심이었고, 정보화의 물결은 90년대로 이어지면서 사회 전 분야에서 출렁거렸다.
해커는 컴퓨터의 역사를 쓸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처음엔 컴퓨터마니아라는 뜻으로 쓰였던 해커가 오늘날엔 네트워크 침입자이자 정보도둑을 가리키게 됐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역시 20세기 빼놓을 수 없는 화두였다. 물론 아날로그가 반드시 디지털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은 오히려 보완관계다. 인간을 닮은 아날로그와 첨단과학기술을 의미하는 디지털의 만남이 정보통신을 조화롭게 발전시키고 있다.
실리콘밸리도 벤처와 함께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어가 됐다. 실리콘밸리는 정보기술의 메카이자 기업가 정신을 상징했고 도전과 모험을 의미했다. 또 일확천금의 꿈이 이뤄지는 기회의 땅으로 생각됐다.
20세기의 삶에서 가전제품을 빼놓을 수는 없다. TV, 라디오, 냉장고, 오디오, 이동전화, 전자레인지, 세탁기, VCR 등 사람들은 전자장치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로봇은 미래를 가리키는 표지판 같은 단어. 그러나 알고 보면 산업용 로봇은 이미 20세기의 공장을 움직이며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왔다. 또 데이터베이스는 자료의 저장창고이자 정보기술의 핵심 솔루션으로 부상했다.
에너지도 20세기의 화두였다.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거둬들였던 에너지는 고갈돼 가고 있다.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원은 다음 세기에도 인류의 과제로 남게 됐다. 광(光)도 통신과 만나면서 20세기에 새로운 빛을 가져다줬다. 0과 1이라는 비트를 실어나르는 빛의 고속도로가 정보사회의 인프라가 되고 있다.
20세기의 대미, 90년대는 인터넷 세상이었다. 국가나 권력기관이 통제할 수 없는 양방향 통신수단으로서 인터넷은 전세계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누구나 거의 공짜로 순식간에 전자우편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인터넷은 국제화, 세계화를 가속시켜 결국엔 시간과 공간을 해체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은 말 그대로 지구촌의 키워드다. 이 말을 최초로 쓴 사람은 64년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를 발표한 마셜 맥루한.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자 전자시대의 문명비판가로 추앙받는 맥루한은 이미 그때 「지구촌 시대」를 예언했다.
사이버는 문화적인 접두어다. 사전적 의미는 「가상」이라는 뜻. 네티즌은 이 가상공간에 현실과 꼭 닮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 가고 있다.
진공관부터 사이버까지 20세기의 키워드들은 단지 기술발달의 산물이 아니라 지난 100년을 이해하는 데 단초를 제공하는 사회문화적 유전자코드라고 볼 수 있다.
이선기기자 sk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