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면 연구과제는 민간이, 장기 연구과제는 정부가 각각 고객이 돼야한다
최형섭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중
『일본이 세계정상을 향해 정신없이 뛸 때는 「따라잡는다」라는 일념에서 일사불란하게 일을 추진해 왔는데 막상 정상에 도달하고 보니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모양이다. 나한테도 미래의 기술 개발전략에 관한 의견을 여러 각도로 물어왔다. 나는 여러가지 방안들을 토의 대상으로 내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연구개발 투자에 대해 「우리가 기술 개발을 시작했을 때는 정부가 80%, 민간이 20% 부담하는 전형적인 후진국 형태였기에 어떻게 하든지 일본이 하고 있는 것처럼 민간이 80%, 정부가 20% 투자하는 유형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와서 한국도 이에 가까이 되어가고 있어 일단 우리의 목표가 달성됐다고 흐뭇해 했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 또다시 사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대열에 진입해야 하는 전환점에 서 있는 만큼 종래의 모방에서 탈피해 창조로 진로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기초에 바탕을 둔 미래지향적 기술개발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장기투자는 민간이 담당하기 어려우므로 정부가 나서야 한다. 다시 말해 당면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개발은 민간이 고객이 돼야 하지만 10년, 20년의 장래를 바라보는 연구개발은 정부가 고객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구 KIST) 초대 소장과 제2대 과기처 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최형섭 박사가 지난 95년에 발간한 회고록. 인용구는 한국 최고의 테크노크라트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소신이 담담하게 나타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