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그 운명을 함께 해왔던 화폐. 정보화가 인간생활의 모든 것을 뒤흔들면서 이제 화폐도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는 10년 전에 이미 「디자이너 통화(Designer Currency)」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견했다. 자본은 화폐와 함께 변화하고 있으며 이 패턴은 중요한 사회적 변혁을 겪을 때마다 새로운 형태로 변신하고 이 과정에서 자본과 화폐의 지식내용이 변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새로운 화폐의 형태로 지목한 것은 「프로그램이 가능한 화폐」, 즉 전자화폐의 등장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현재 눈부시게 진행중인 정보화를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화두는 단연 「디지털」. 문서·음성·영상 데이터를 마음대로 가공한 멀티미디어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기술적 핵심이 바로 디지털이다. 이같은 디지털의 속성을 가미해 최근 등장한 것이 바로 전자화폐다.
여기에 개방성과 보편성을 전제로 하는 인터넷의 급부상은 전자상거래(EC)를 태동시켜 네트워크상에서의 지불수단인 전자화폐의 출현을 부채질했다.
물론 EC의 핵심적 지불수단인 전자화폐는 네트워크상에서의 결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단말기와 카드만 있으면 교통수단 이용과 상품구매, 서비스 이용 등 일상적 재화나 용역을 취득하는 데 널리 쓰일 수 있어 지금처럼 현금의 발행·관리에 막대한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 수천년동안 인류의 생활을 지배해온 실물화폐가 전자화폐라는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미국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주피터커뮤니케이션은 전자화폐의 성장성과 관련해 주목할만한 결과를 내놓았다. 이 회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자화폐가 주로 1만원 이하 소액 결제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만 이를 통한 온라인 결제 규모가 미국에서 무려 3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 전체 온라인 상거래에서 10달러 이상은 신용카드가, 10달러 이하 소액 결제수단은 전자화폐가 주요한 지불수단이 될 것으로 이 보고서는 전했다.
이처럼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사용이 급증할 것으로 보이는 전자화폐는 현재 각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시험운용중이다.
전자화폐는 그 운용방식에 따라 칩카드에 가치를 저장해 사용하는 IC카드형과 PC의 하드디스크에 저장해 사용하는 네트워크형으로 나뉜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운용되는 전자화폐는 IC카드형이 대부분으로 몬덱스·비자캐시·프로톤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몬덱스는 현재 뉴욕·홍콩 등지에서 이미 상용서비스를 시작했고 전세계 15개국, 1270만개의 가맹점에서 운용중이다. 몬덱스는 현재 국제적 호환 결제시스템을 구축중이며 유일하게 개인간 자금이체가 가능한 오프라인형 전자화폐로 점차 그 사용범위가 확대되는 추세다.
PC에 그 가치를 저장, 온라인 지불을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형 전자화폐로는 디지캐시가 개발한 이(e)캐시가 대표적이다. 이캐시는 현재 미국·호주·독일·핀란드·스웨덴 등지에서 시험운용중이다. 젬플러스·슐렘버거·베리폰 등 카드제조사는 물론 AT &T·IBM·도시바 등 통신·컴퓨터업체도 이캐시에 공동 참여하고 있다.
국내 전자화폐시장도 올해를 기점으로 그 서막을 올릴 전망이다.
마스타카드코리아·비자코리아·금융결제원 등은 「21세기 미래형 돈」으로 불리는 전자화폐시장이 조만간 급성장할 것으로 보고 자체 전자화폐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주요 호텔과 대형 사무실을 대상으로 시범서비스를 실시하는 등 시장선점을 위해 발빠른 행보를 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빨리 전자화폐 시험운영에 들어간 곳은 마스타카드코리아. 마스타카드코리아는 지난해 10월 제주도에서 개최한 연차총회를 통해 자체 개발한 「몬덱스」를 선보이고 300여명의 행사 참석자를 대상으로 제주 KAL호텔과 인근 편의점, 토산품점 등 20여개 가맹점에서 실제 물품구매가 가능한 시범서비스를 실시했다. 마스타카드는 제주도 시범서비스를 계기로 5월께 시작하는 제주 관광카드에 몬덱스를 탑재, 국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항공·숙박·스포츠 등 모든 관광에 현금 대신 몬덱스 전자화폐로 지불결제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또 마스타카드는 3월 완공 예정인 코엑스 무역센터 방문객을 위해 전자화폐기능을 통합한 IC칩 기반의 멀티카드 개발을 추진중이며 마스타카드코리아가 2002년 월드컵대회 공식 스폰서라는 장점을 활용, 국내 전자화폐시장 선점을 위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비자코리아도 지난해 12월부터 여의도 시범운용에 들어간 「스마트카드」에 빠르면 상반기중 전자화폐인 「CEPS」기능을 탑재할 예정이다. 비자코리아는 올 하반기부터 전자화폐시장 선점을 위해 스마트카드에 신용·직불·전자화폐 기능은 물론 기타 다양한 기능을 탑재해 시장선점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국가기관의 전자화폐사업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한국은행과 금융결제원은 접촉·비접촉 방식을 통합한 한국형 전자화폐인 「K Cash」를 선보이고 실용화를 위한 사업을 추진중이다. 현재 서울 역삼동 지역을 시범 지역으로 선정, 구체적인 성과물을 갖추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 지난해 12월 산업자원부가 실물거래는 물론 온라인 전자상거래(EC)시장을 겨냥한 IC카드 기반 개방형 전자화폐시스템 개발사업을 위해 IC연구조합 컨소시엄을 최종 사업자로 선정했다.
2002년, 2003년, 2004년 등 총 3단계로 나눠 전자화폐시스템 개발 계획을 추진하기로 한 IC연구조합은 보안성·편리성·휴대성이 뛰어난 IC카드형 결제수단, 전자상거래를 위한 결제시스템, 국내 IC카드 및 전자화폐 관련 기술력 확보와 국제 경쟁력 차원에서 시스템 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또 산자부는 국내외 전자화폐 및 관련 시스템을 조사 분석하는 총괄 관리기관으로 전자화폐추진기획단을 설치하기로 했다. 기획단은 과제별 주관기관, 참여기업, 위탁기관 및 조합 회원사 등 35개사가 참여하며 2002년 전자화폐 시범사업 전까지 개방형 전자화폐 개발과 관련한 모든 실무작업을 맡게 된다.
IC연구조합 컨소시엄은 이 전자화폐시스템을 2002년 열리는 월드컵부터 시범서비스를 제공하고 2003년 시범사업 결과에 대한 검증 모델을 거쳐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이외에도 버스카드나 상품권처럼 인터넷에서 유료서비스 이용료나 상품 구입비용을 간단하게 지불할 수 있는 소액 전자화폐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소액 전자화폐는 신용카드로는 결제가 안되는 1000원 미만까지도 온라인으로 지불이 가능하고 단위금액도 5000원권부터 10만원권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서비스업체와 이용자 모두에게 매우 편리한 결제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대표적인 업체들로는 이니시스·이코인·KICC·아이캐시·범아종합경비(웹머니) 등이 있다.
* 용어해설-전자화폐
현재 국내외에서 전자화폐는 그 개념조차 많은 논란이 존재한다.
따라서 전자화폐의 동향을 논의하기에 앞서 우선 그 개념부터 명확히 짚을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해 전자화폐는 지금의 주화나 지폐를 대체하는 일종의 「현금」으로, 주로 소액거래가 그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주화나 지폐가 지닌 속성을 고스란히 이어 받는다는 얘기다. 이때 다만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이 종이나 금속이 아닌 디지털정보인 것이다.
전자화폐는 전자지갑(Electronic Purse)·가치저장카드(Stored Value Card)·스마트카드 등과 때로 혼동하기 쉽다. 전자지갑은 스마트카드의 칩운용체계(COS) 위에 탑재할 수 있는 일종의 응용프로그램으로 전자화폐를 담는 그릇이다. 가치저장카드도 전자지갑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들 두 개념은 디지털가치를 먼저 저장한 후 사용한다는 차원에서 「선불카드」로 불리기도 한다.
스마트카드와도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자지갑·전자화폐·신용카드·직불카드 등 응용프르그램을 아우르는 CPU 지능형카드로서 역할을 하는 스마트카드는 전자화폐와는 명백히 다르다.
이처럼 전자화폐와 스마트카드를 자주 혼동하는 이유는 일종의 응용프로그램인 전자화폐가 현존하는 보안수단 중 가장 안전한 것으로 알려진 IC칩 기반의 스마트카드에 흔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전자화폐가 기존 현금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전제 아래서는 실물화폐의 속성을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만이 갖는 장점이 있어야 한다.
우선 실물화폐가 지닌 자유로운 양도성, 사용자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는 익명성을 지녀야 하고 공간적인 제약이 없어야 하는 점은 공통이다.
하지만 전자화폐는 그것만이 갖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차세대 지불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우선 시공간을 초월한 네트워크상에서의 지불이 가능하므로 EC의 급부상에 따른 보편적 지불수단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지난해의 경우 국내에서 10원짜리 동전을 발행하는 데 27원이 소요됐고 그 유지관리에 추가비용이 드는 등 실물화폐 관리에 따르는 비효율성을 해소할 수 있어 화폐 유통에 따른 경제성도 확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소액단위의 현금을 다량으로 휴대해야 하는 사용자의 불편을 해소할 수 있고 양도나 거래의 과정에서 화폐 위·변조가 불가능한 안정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돈세탁과 비자금 등으로 악용될 소지도 있기에 현재 세계적으로 시범운용중인 전자화폐는 가치저장한도를 대체로 수만원에서 수십만원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홍기범기자 kbhong @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