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통신 기반 확충
19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KTA, 현 한국통신)의 출범에서부터 1988년 행정전산망 사업의 추진 시점까지의 기간은 한마디로 우리 나라 정보통신의 기반이 확충되는 시기였다. 이때의 주요 사건들로는 이밖에도 1982년의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현 데이콤)의 출범, 1983년 정보산업의 해 선포, 1984년 국산전전자교환기 TDX 1의 개발, 1987년 전화 1000만 회선 돌파 그리고 1988년 88서울올림픽전산시스템의 성공적 운영 등이 있다.
KTA 설립에 대한 움직임은 이미 1970년 이전부터 있었다. 1965년 민간 연구기관이던 한국산업능률본부의 전기통신사업부문 공사화에 대한 연구, 1968년부터 체신부가 자체조직으로 운영했던 공사제도 연구위원회의 조사활동, 1975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이 수행한 체신공무원 단독신분 및 단독보수제 확립을 위한 연구, 그리고 1979년 한국통신기술연구소의 통신사업경영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 등이 바로 그런 사례들이었다.
이런 움직임들은 대개 전기통신사업의 경영형태와 관리체제의 근본적인 개편 즉, 별도의 공기업 출범 쪽으로 결론이 나곤 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고와 공공성이 강한 전기통신사업을 어떻게 정부가 아닌 주체가 경영을 할 수 있겠느냐는 보수적 시각에 매번 부딪쳐 결실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일대 전환의 계기가 마련된 것은 새 정부가 들어선 1980년 9월 대통령의 검토 지시였다. 이 지시에 따라 체신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체신부내 관계국장과 외부전문가 3인으로 구성된 경영체제개선 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때부터 전기통신사업의 공사화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돼 3개월만인 1980년 12월 위원회가 작성한 「통신사업경영체제개선」 문건이 마침내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15년 동안이나 지체되던 전기통신사업 부문의 공사화 논의가 단 3개월만에 매듭을 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과 오명 경제비서관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김재익 수석의 경우는 특히 이미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으로 재직시절부터 교환기 문제 및 체신부 운영체계의 문제점 등에 대해 상당한 검토를 해오던 터였다.
1981년 4월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법이 제정되고 전기통신법이 개정되면서 KTA 출범에 대한 법적 장치가 마련됐다. 경영체제개선위원회는 곧바로 한국전기통신공사설립위원회로 확대 개편되고 이어 5월에는 오명 비서관이 체신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설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KTA 출범 작업은 순풍에 돛을 달았다. 설립위원회의 초기 위원들을 보면 정규석(체신부 차관, 나중에 오명), 배호원(체신부 기획관리실장), 이희두(체신부 보전국장), 유택노(체신부 기술조정관), 가재남(체신부 통신시설연구소 설계부장), 오명(나중에 홍성원), 김무룡(경제기획원 예산관리관, 나중에 문희갑), 이용성(재무부 재산관리국장, 나중에 이동호), 정문화(총무처 행정관리국장), 경상현(한국전기통신연구소 선임부장) 등이다.
KTA의 골격은 우선 체신부에서 전기통신업무를 전담하던 전무관서와 장거리청, 통신시설사무소, 시험검사소, 전자계산소 등의 경우 업무·재산·인원의 원형 그대로 수평전환하여 구성키로 했다. 그러나 전기통신업무를 겸장하는 관서중 현업관서는 시설의 유지보수 담당 부서만 공사로 전환하고 본부와 체신부 및 직할관서는 전무관련조직만 분리키로 했다.
다만 전보, 창구전화, 시외 통화, 요금 수납 및 전화영업 업무는 KTA로 이관하되 체신부가 KTA로부터 위탁받아 계속 취급키로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때 KTA로 이관된 전기통신 부분 체신관서 수는 직할기관 5개, 전신국, 전화국, 전신전화국, 전신전화건설국 등 148개 현업기관 등이었다.
자본금은 1981년 12월 1차로 현금 5억원을 시발로 3차에 걸쳐 고정자산과 유동자산 등의 형태로 출자가 이뤄졌다. 이로써 KTA는 1982년 1월 1일 정식 출범 때까지 고정자산 1조9524억원, 유동자산 3526억원 기타 1272억원 등 모두 2조4322억원의 자산을 체신부로부터 인수하였다.
1월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거행된 KTA창립현판식에는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초대 이우재 사장, 최광수 체신부 장관, 그리고 황인성 국회 교통체신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우리 나라 데이터통신 정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데이콤의 발족은 이용태 당시 컴퓨터이용연구원 원장이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오명 차관과 홍성원 청와대 경제비서관이 밀어붙여 일궈낸 3인의 공동 작품이었다.
1980년 12월 체신부가 작성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낸 「데이터통신사업 육성 정책」 문건을 보면 당시 상황에서 정부가 적극 육성해야할 분야로는 정보의 생산과 가공 및 저장, 데이터의 전송, 컴퓨터와 주변장치의 생산, 통신회선의 보완과 데이터통신전용회선의 건설 등 5가지였다. 데이콤은 바로 5번째 분야를 전담할 민간회사였다.
회사형태는 여러 가지 안이 검토된 결과 정부와 산업은행 및 민간기업 3자가 복합 참여하는 독립된 민간회사로 정해졌다. 1981년 8월 체신부장관의 승인과 함께 오명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설립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참여 위원들을 보면 관료 위주의 KTA설립추진위원회와는 달리 당시 활동하던 전문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주요 인사들로는 오명·홍성원·이용태를 비롯하여 성기수(KAIST 전산개발센터 센터장), 경상현(한국통신 부사장), 이원웅(한국전자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 김창수(대한전선 부사장), 최영환(과기처 정보산업국장), 이응효(체신부 계획국장)등이다.
설립추진위원회의 본격적인 활동과 함께 대두된 것은 데이콤의 기업 형태였다. 가장 강력하게 대두된 방안은 데이콤의 모든 사업이 결국은 한국통신의 회선을 빌려서 하는 형태가 될 것이므로 KTA가 경영의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1981년 11월 23일 남덕우 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채택된 결론은 독립된 순수민간회사였다.
출자회사의 자격은 일단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원사, 텔레비전방송국 및 통신사, KTA 등으로 정해졌고 총 출자금액은 59억8000만원으로 정해졌다. 1982년 2월 확정된 26개 출자회사들은 KTA(지분율 33.45%) 외에 한국방송공사·연합통신 등 방송 및 통신사를 비롯해 삼성전자·삼성전관·한국전자통신·중앙전기·한국상역·한국전자·동양나이론·금성사·금성반도체·한도공업·금성전기·금성통신·동양정밀·국제상사·대한전선·대한통신·광림전자·대영전자·국제전자·오리콤·제일정밀·광진전자·대성전자통신 등이다. 민간 기업 지분율은 8.36%에서 0.83%까지였다.
데이콤의 창립행사는 이용태 초대사장, 최광수 체신부장관, 오명 차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82년 4월 28일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의 국제회의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정부가 19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한 것은 사실상 KTA와 데이콤 출범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해 1월 28일에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차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 선포된 정보산업의 해는 정부가 이제 막 손에 잡힐 듯 말 듯하던 정보통신산업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산업 분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보산업의 해 선포는 이날 기술진흥확대회의에 참석했던 이용태 데이콤사장이 정보통신업계를 대표해서 제안한 건의 형식으로 이뤄졌다. 이날 회의에서는 또 이정오 과기처장관이 정보산업의 해에 대한 가시적 성과를 위해 향후 5년 동안 2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각종 정보화 시책을 추진키로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날 이후 과기처·상공부·체신부를 비롯, 유관부처인 문교부(컴퓨터교육), 총무처(전산행정) 등 5개 부처 관계자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 5개 부처 관계자들이 합동으로 만든 게 바로 우리 나라 최초의 정보통신산업 종합 육성방안인 「정보산업 육성방안」이다.
1983년 3월 14일 대통령에게 정식 보고된 이 문건에 따라 대통령비서실장을 위원장으로 관련부처 차관과 수석비서관들이 참여하는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조직은 그해 12월 국가기간전산망계획(안)을 내놓았고 이 안에 따라 새롭게 국가기간전산망 조정위원회가 발족됐다.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한 일은 1980년대까지 유사이래 최대 국가 프로젝트라고 일컬어졌던 행정전산망·금융전산망·교육연구전산망·국방전산망·공안전산망 등 이른바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의 기획과 추진이었다.
한편 1987년 9월 30일에는 유선전화 가입시설 1000만 회선이 돌파하는 대 사건이 벌어졌다. 남과 북이 사실상 갈라진 1947년 4만5000여 선에 불과했던 전화회선이 40년 만에 220배 이상이 증가한 셈이었다. 1000만 회선 돌파의 주역은 국산전전자교환기 TDX 1시리즈였다.
TDX개발사업은 1984년 한국통신 내에 TDX사업단을 설치하고 금성반도체·대우통신·동양전자통신·삼성반도체통신 등 민간 4사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간 개발사업에 대한 기본협약이 체결되면서 급피치를 올렸다. 국산 TDX는 1985년 9월 가평·전곡·무주·고령 등 4개 지역에 6000 회선규모가 실전 배치되면서 전전자교환기 시대를 알렸다.
TDX 1은 1986년 TDX 1A, 1989년 TDX 1B 등으로 업그레이드됐고 전전자교환기의 꽃이랄 수 있는 대용량 TDX 10은 1991년 경 개발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