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의 꿈 가운데 하나는 50억 전인류 개개인의 정보를 수록한 전자 자서전을 만드는 일이다. 과학자들은 개개인의 모든 정보를 수록하는 데 대략 인간 뇌세포 수의 10배 가량인 100Gb가 요구된다고 한다. 따라서 50억 전인류의 자서전을 위해서는 「50억×100Gb」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용량의 기억매체가 필요하다.
이런 기억매체 용량을 충족시키려면 기억 용량을 더욱 늘려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미크론 크기의 메모리 소자를 아무리 줄여도 어느 단계에 이르면 물리적 한계에 도달해 기억매체로 쓸 수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정보의 최소단위인 비트(bit)를 구성하는 회로소자의 크기(선폭)가 더욱 미세해져 정보기억 수요가 증가되는 만큼의 고집적도 기억매체가 등장해야 한다.
이와 관련 지난 71년 발표된 인텔의 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에서 회로소자 하나의 크기(선폭)는 10㎛. 이로부터 28년이 지나 발표된 펜티엄 Ⅲ의 회로소자는 40분의 1인 0.25㎛로 줄었고 회로 집적도는 무려 4000배 이상 증가했다.
현재 구현된 선폭기술은 0.18㎛다. 이 기술로 구현되는 반도체 기억용량은 고작 4∼16Gb 정도. 광자기 등 갖가지 자기(磁氣)적인 방법이 모두 동원된 결과다. 그마나 선폭은 0.04㎛에 이르면 집적도의 증가가 불가능하다. 또 일반 자성물질의 크기가 0.03㎛ 수준에 이르면 자기기록밀도를 더 이상 향상시키기 어려운 초상자성한계(Super Paramagnetic Limit)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가 ㎚(나노미터) 즉, 10억분의 1m의 회로에서도 자성을 갖게 해주는 「나노 기술(Nano Technology)」.
나노의 뜻은 그리스어의 「난쟁이」에서 유래한 말로 10억분의 1을 가리키는 미세단위. 1나노는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에 해당한다. 원자 하나의 크기가 대략 0.2㎚라는 것을 감안하면 나노기술의 범위가 얼마나 미세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나노기술은 원자(原子)의 세계를 다루는 초미세 기술이다. 원자 하나하나를 기계적으로 제어, 초상자성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즉 물질의 설계도인 결합구조에 맞춰 원자들을 기계적으로 적절히 결합시킴으로써 원자들로부터 그 무엇이든 필요한 물질을 제조하는 것이다. 참으로 꿈 같은 이야기로 반도체에 접목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반도체 집적도를 실현한다는 것이 그 목표다.
이렇게 되면 200평 크기의 슈퍼 컴퓨터가 데스크톱 크기로 작아지고 인체 탐험이 가능한 마이크로 머신이 출현하는 것은 가장 흔한 예가 될 것이다.
원자의 세계를 다루는 나노기술이 대두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5년 전 안팎이다. 지난 85년 IBM 스위스 연구소 하이니 로러와 G 비니그 박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조작할 수 있는 주사터널링현미경(STM)·원자힘현미경(AFM) 등의 발명이 계기가 됐다. 이 현미경들은 실시간 및 실공간에서 원자크기 이하 수준의 강력한 분해기능을 지니고 있어서 원자나 분자를 마음대로 조작해 모양을 변형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원자나 분자 하나에 정보를 기억시킬 수 있다.
지난 90년대 들어 이 같은 나노기술은 세계 선진국에서 첨단 선도기술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실제적인 연구와 응용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외국에서는 이미 원자나 분자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원하는 글씨나 구조를 만들어 냈다.
미국의 경우 IBM의 앨메이든연구소 아이글러 박사팀은 지난 90년 초저온에서 27개의 크세논 원자를 일렬로 움직여 IBM 글자를 구성, 원자를 이용해서 정보를 기억시킬 수 있음을 입증했다.
또 STM의 탐침으로 철(Fe)원자들을 구리결정 표면에서 하나씩 움직여 한자어인 「原子」의 이미지를 구성해 냈다.
이어 일산화탄소(CO) 분자들을 이용해 백금결정표면에 사람 형상을 구현하기도 했다.
위스콘신대의 H 거클 교수팀은 미크론미터 단위의 톱니바퀴들을 만들어 냈으며 코넬대 연구팀도 실리콘 결정체 위에 nm 규모의 기타와 하프를 만들어 냈다.
노스웨스턴대 차드 A 머르킨 교수팀은 15㎚ 굵기의 원자펜 개발에 성공한 데 이어 지난해 10월에는 AFM을 이용해 원자 내 분자크기의 글씨나 도형을 만들 수 있는 「딥펜 나노리소그라피(Dippen Nanolithography)」를 개발했다.
또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학 찰스 리버 교수팀도 미세한 유리막대를 금(Ag) 전극으로 둘러싼 뒤 이 전극에 지름이 50㎚, 길이가 4미크론(1㎛=100만분의 1m)인 탄소 나노튜브 두 가닥을 붙여 나노핀셋(Nanotweezer)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나노핀셋이 앞으로 생물세포를 조작하거나 나노기계를 만들고 미세수술 등의 분야에서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지난 91년 이지마 박사가 버키볼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노기술 구현용 신소재인 탄소 나노튜브를 처음 발견했다. 또 93년 NEC의 오시야마 박사팀은 탄소 나노튜브를 반도체로 활용할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구명했다. 이와 함께 98년 덴소사는 도요타 승용차 실물의 1000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나노기술 기반의 마이크로카를 제작,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독일에서도 나노기술을 응용해 쌀알 5개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말벌 크기의 헬리콥터를 제조한 바 있다.
국내 나노기술 분야 연구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주관하는 극미세구조기술개발사업단 및 서울대 나노기억매체연구단이 지난 96년과 97년 각각 10년·9년 연구목표의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또 96년 국가지정연구센터로 출범한 연세대 초미세표면과학연구센터도 나노기술 연구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많은 전문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특히 나노기술을 구현할 신소재로서의 탄소 나노튜브에 대한 국내 연구는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탄소 나노튜브는 6각형 고리로 연결된 탄소들이 긴 대롱모양을 이루는 지름 1㎚ 크기의 미세한 분자. 탄소다발은 수직방향으로 탄력적이며 구부러져도 꺾이지 않고 원형으로 복원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초강력 섬유, 열과 마찰에 잘 견디는 표면재료, 충격 완화제 등에 응용될 수 있다. 또 nm 크기의 선폭을 이용해 기억소자나 회로를 만든다면 테라(tera)급 집적도의 반도체 칩을 만들 수 있다. 서울대 물리학과 임지순 교수는 지난 98년 도체인 이 탄소 나노튜브가 반도체 성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찾아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0세기가 마이크로 시대라면 21세기는 나노 시대가 될 것이다. 즉 100만분의 1인 마이크로 세계보다 1000분의 1만큼 더 작은 나노에 대한 제어기술이 새로운 시대를 실현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