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IT업체의 "약속의 땅" 테헤란로 25시(1)

지난 22일 낮 1시께 역삼역 금융결제원 빌딩 후문쪽 후미진 뒷골목. 한 오피스텔은 PC만 켜져 있을 뿐 사람들은 없다.

 사장실로 쓰는 한 구석방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네 명이 널찍한 테이블에서 사이좋게 도시락을 먹고 있다. 영림원이라는 기업용 SW 전문업체의 엔지니어들이다.

 홍일점인 기획관리팀의 배영화 대리(30)는 『격주 휴무제로 오늘은 쉬는 날이지만 3월까지 새 버전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출근했다』고 말했다.

 휴일인 데도 출근해 일하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거리가 있다.

 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서 선릉, 역삼, 강남, 교대, 서초역까지 서울 강남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테헤란로다. 이 곳은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릴 정도로 SW·이동통신·네트워크 등 정보기술(IT) 벤처기업들이 한 데 몰려 있다.

 한때 테헤란로는 「한국의 월스트리트」로 불렸다. 이 길을 따라 은행과 증권사 지점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제 테헤란로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다.

 테헤란로에 IT 벤처기업들이 하나 둘 둥지를 치기 시작한 때는 지난 90년대 초다. 특히 IMF 이후 이 지역의 임대료가 내려가자 벤처기업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줄잡아 1000여개의 벤처기업들이 모여있다.

 IMF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임대료도 이곳을 향하는 벤처기업들의 발길을 막지 못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사무실 임대물건이 나오면 건물주와 재계약시 며칠 걸리지만 이 곳은 몇 시간만에 해결된다고 하던데요.』 역삼역이나 선릉역 주변을 알아보다가 매물도 없고 임대료가 비싸 포기하고 교대역 부근에 사무실을 낸 박인철 넷포츠 사장(29)의 말이다.

 테헤란로는 이제 「입성 자체가 사업보장」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IT 벤처기업의 천국이다.

 역삼역과 선릉역 사이 언덕배기에서 테헤란로 동쪽을 보면 데이콤·삼성SDS·현대전자·한국통신프리텔 등 대형 IT 업체들의 간판이 확 눈에 들어온다.

 강남역쪽도 마찬가지다. 한솔PCS·비트컴퓨터·야후코리아·아이네트 등 내로라하는 IT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또 건물 외벽마다 「www」로 시작해 「.com」 또는 「kr」로 끝나는 긴 플래카드가 경쟁적으로 늘어뜨려져 있다.

 『인터넷 경매 사이트를 보다가 창밖을 봤는데 바로 앞 건물에 그 사이트가 눈에 보이는 거예요. 「내가 IT 산업의 중심에 있구나」하고 실감나던데요.』 지난해 말 여의도에서 테헤란로로 이사 온 한국오라클에 근무하는 이진구씨(31)의 말이다.

 이 곳은 획일화한 제복의 행원들보다는 진바지 차림에 출입카드를 목걸이처럼 늘어뜨린 사람들이 많다. 또 테헤란로에는 편의점·패스트푸드점·음식체인점 등 젊은층이 주로 찾는 곳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 같은 것들을 제외하면 이 곳이 벤처거리임을 실감케 하는 것은 없다. IT 기업에 가려 상대적으로 예전보다 적어보이지만 삼성역에서 역삼역까지 길을 따라 늘어선 큰 건물의 1층을 어김없이 차지하는 것은 은행 지점이다.

 또 운전학원에서 업종을 전환한 선릉역 주변에는 중고 자동차 매매업소가 밀집돼 있으며 강남역 사거리 부근에는 룸싸롱과 음식점이 밀집돼 있다. 서초역과 교대역 부근은 벤처거리라기 보다는 법조거리에 가깝다.

 한마디로 이 거리는 벤처거리로서의 문화나 특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이 곳에 변변한 대학이나 연구단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벤처산업의 원동력인 산학협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지역이다.

 더욱이 테헤란로에 입주한 업체들은 대기업이거나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중견 벤처기업들이다.

 벤처기업들은 테헤란로나 인접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뒷골목 후미진 곳에 있으며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다.

 아무리봐도 테헤란로는 그저 고층 사무실이 밀집된 오피스거리일 뿐이다. 점심시간이나 저녁 퇴근시간 무렵 테헤란로에 쏟아져 나오는 노점상들의 모습은 을지로나 여의도의 오피스타운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이 곳에 벤처기업들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다. 벤처기업들이 사업에 필요한 정보 획득에서 이곳만큼 좋은 곳이 국내에 없기 때문이다.

 특허청 뒷골목에서 부동산 중개소를 운영하는 최규대씨(50)는 『요즘 임대 사무실을 찾는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나와 있는 임대 물건이 없어 되돌려 보내기 일쑤다』라고 말했다.

 길은 역사를 담는다. 70년대 테헤란로는 해외로 뻗어나가는 국내 건설 산업의 상징이었다. 80년대들어 이 거리는 재테크 열풍에 힘입어 금융가로 변모했다. 90년대 후반기들어 국내 IT 산업이 번창하면서 테헤란로는 IT 기업들의 거리로 바뀌고 있다.

 자동차가 드물던 20여년 전 이 거리는 마치 고속도로처럼 질주할 수 있었다. 이제 테헤란로는 넘치는 차들로 꽉 막혀 있다.

 그래도 이 거리를 질주하는 게 있다. 인터넷 속도만큼 빠른 정보들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