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의 낮과 밤
구청이 운영하는 뚝섬역 인근 벤처 타운에서 지난주 강남역 근처 산내들 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긴 지오윈의 박인철 사장.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야후 코리아의 간판을 보고 있으면 야릇한 쾌감을 느낀다.
『사실, 벤처 타운에 있을 때는 사무실 임대료가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테헤란로는 월 사무실 임대료만도 몇천만원 수준이니 중소 벤처업체들에는 적잖은 부담이지요. 그럼에도 굳이 이곳으로 사무실을 옮긴 것은 그동안 우리가 준비해 온 상품이 그만한 부가가치를 충분히 창출해낼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때문입니다.』
포스코센터 바로 맞은 편에 사무실을 둔 알테라코리아의 손선미 차장도 『테헤란로를 따라 매일 출퇴근을 하다보면 스스로가 국내 IT산업의 최고 메카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실제로 테헤란로의 대형 건물들 안에는 셀수없이 많은 IT업체들로 가득차 있다. 현재 테헤란로에 입주해 있는 대형 또는 중견 정보통신업체들만도 줄잡아 200여개가 넘는다. 여기에 몇몇 벤처 타운에 입주해 있는 「칸막이 업체」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부지기수로 늘어난다. 더구나 몇 년 전만 해도 여의도에 사무실을 마련했던 외국계 정보통신업체들도 최근 이곳으로 둥지를 옮기거나 새롭게 문을 열고 있다.
테헤란로 벤처기업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 밤을 꼬박 새우는 것은 예사고 며칠째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무실에 간이침상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래서 회사 인근에는 직원들이 잠깐 눈을 붙이기 위한 아파트나 오피스텔이 마련돼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24시간 편의점은 필수다.
『요즘 테헤란로에서 건물주와 입주 벤처기업간의 가장 큰 갈등은 임대료가 아니라 현관문 닫는 시간과 난방의 24시간 지원 여부입니다. 벤처기업들로서는 한참 일할 시간인 저녁 9시 정도에 난방이 끊기고 현관문을 내리는 건물들이 많기 때문이죠.』(디오텔 이정훈 사장)
최근 역삼역 인근 서울 벤처 타운에서 만난 한 벤처기업 직원도 『벤처 타운에 입주한 40여개의 벤처기업들은 밤 12시만 넘기면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현관문이 닫히는 바람에 새벽에 퇴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불만을 털어놨다.
또 이들 대부분은 복장도 자유로워 벤처기업들이 많이 모여 있는 빌딩에서는 청바지에 T셔츠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만나는 것은 다반사다. 때문에 이들 벤처기업의 사무실은 마치 대학캠퍼스의 동아리방에 온 기분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테헤란로에 있는 소규모 벤처기업들의 사장과 직원은 수직적인 서열관계보다는 동료라는 수평적인 의식이 더 강하다. 사업 출발때부터 실패에 따른 위험을 같이 안고 시작한 데다 매일 하는 일의 내용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의도 직장을 그만두고 홍보 대행사로 자리를 옮기며 테헤란로에 출근하게 된 벤처피알의 오미라 팀장은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여의도와는 다른 이 지역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확실히 느끼고 있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바리 코트 복장의 샐러리맨들이 종종 걸음을 걷는 일반 직장가의 모습을 테헤란로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요. 또 주말도 없이 밤낮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인근 식당들도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많고 가끔씩 음식을 배달시키면 놀랄 정도로 빠릅니다.』
최근 테헤란로에 싹트기 시작한 또 하나의 새로운 풍습 가운데 하나가 관련업종에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친목 모임이다. 바로 옆 건물에 모여 있으니 굳이 약속시간을 부담스럽게 잡을 필요도 없다. 점심 약속이 없는 날에 식사를 같이 하며 정보를 나누고 식사 후 간단한 차 한잔도 새로운 만남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소모임에 참가해보면 굳이 업무 얘기가 아니더라도 자녀 교육이나 주식 등 일상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끔씩은 새로운 직장이나 일자리에 대한 제의도 받을 때가 있다』는게 한 여성 참석자의 귀뜸이다.
요즘 테헤란로에서는 이러한 소모임이 보다 정례화된 모임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주로 퇴근 후 논현동에 위치한 「비틀즈」라는 생음악 호프집에서 모임을 갖는 「까당스」는 IT분야 홍보 전문가들의 음악 동호회다. 인터넷업체 관계자들의 친목모임인 「아이비(IB) 리그」와 테헤란로 창업투자회사들간 정보교류의 장인 「@벤처클럽」도 최근에 생겨났다.
테헤란로 입성 1호 업체에 해당하는 비트컴퓨터의 조현정 사장도 이러한 소모임의 활성화를 매우 긍정적인 일로 평가하고 있다.
『IT분야에서의 주요 성공 요소 가운데 하나가 다른 업체들과의 상호 정보 교류이며 선배 벤처사업가로서 청바지 차림의 후배 벤처사업가들을 만나 직접 얘기를 나누고 사업적인 관계도 가질 수 있는 장소 하나쯤은 마련돼야 한다』는게 조사장의 생각이다. 그래서 조사장은 테헤란로 중심가에 있는 카페나 호프집을 인수해 벤처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며 관련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
흔히들 테헤란로에는 독특한 문화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샐러리맨을 위한 포장마차나 잘 나가는 유흥가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테헤란로 문화는 미개척지를 찾아 여기까지 흘러온 이곳 사람들이 만들어가야 한다. 말하자면 이제부터가 출발이다. 그래서 IT와 벤처의 메카이자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떠오른 테헤란로에는 지금 아이디어와 꿈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열풍이 불고 있다.
주상돈기자 sdj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