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설 지나고 휴가를 내죠, 뭐.』
현대전자 이천공장에서 근무하는 유경희씨(29)는 올 설에도 고향에 갈 수 없다. 벌써 몇년째인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기숙사에서 설을 쇠게 됐다. 『라인을 풀가동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후배 동생들에게 양보해야죠.』
그 역시 「어린 후배 동생」이었던 90년대 초반에는 고향에서 명절을 보낼 수 있었다. 『입사 이후 94년 설에 처음 고향에 못 갔어요. 귀향버스가 떠나던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한참 울었어요.』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명절은 없다. 삼성전자·현대전자 등 반도체업체들은 설이든 한가위든간에 상관없이 1년 365일 생산라인을 풀가동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말부터 주문이 쇄도, 지금의 생산라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생산설비를 놀릴 경우 막대한 손해를 입는 것은 물론 생산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가전제품과 같은 다른 생산라인과 달리 끊임없이 라인을 가동해야 한다.
더구나 IMF 이후 흑자기조를 유지해왔던 무역수지가 지난 1월 적자로 돌아섰다는 말에 반도체업계 사람들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어 이번 연휴에도 편안하게 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생산5팀 소속 유씨가 일하는 곳은 반도체공정 가운데 박막필름을 입히는 공정이다. 23명으로 이뤄진 조의 대장이다. 그래서 조원들은 그를 「리더걸」이라고 부른다. 그의 조에서 올 설에 일할 사람은 모두 18명이다. 고향에 가는 사람은 다섯명뿐이다.
작업은 3교대로, 유씨는 설 내내 매일 오전 6시부터 8시간 동안 일하게 된다. 근무가 끝난 낮시간에는 요즘 취미삼아 배우기 시작한 홈패션에 몰두할 생각이다.
유씨가 현대전자에 입사한 날은 90년 7월 15일. 올해로 근무 10년째다. 전북 남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 왔다. 고향 친구보다도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 더욱 친하다.
남원 집에는 올해 55세인 어머니가 홀로 산다. 1남3녀 중 셋째딸이다. 언니 둘과 여동생은 이미 출가했고 그만 미혼이다. 남자친구도 없고 사귈 시간은 더욱 없다.
그래서인지 그의 올해 소망은 결혼. 아홉 나이에 걸리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상 가장으로서의 부담을 덜고 한번쯤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대학생인 남동생은 군에서 곧 제대해 복학할 예정이다. 유씨는 결혼하고도 계속 일하고 싶어한다. 사내 커플이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이따금 한다.
『보람을 느낄 때요? 생산목표를 제대로 달성할 때죠.』 기숙사를 마치 고향집으로 여기는 스물아홉살 처녀의 말에서 「제품이 없어 못 파는」 반도체업계의 호황을 감지할 수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