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버전<16>
처음에는 선에서 이상이 있는 것일까 하고 모든 선을 갈았다. 그렇게 했지만, 원인 규명은 되지 않았고, 트러블이 지속되었다. 다음에는 칩에 이상이 있는지 점검을 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날 밤을 꼬박 새웠던 것이다. 새벽에 윤 과장이 밖으로 나가 김밥과 맥주를 사왔다. 그것을 먹자 윤 과장은 졸림을 참지 못하고 한옆에 쓰러져 잠들었다. 그러나 나는 트러블의 원인을 찾지 못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트러블 슈팅은 기술자에게는 적이다. 적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잠이 들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가져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기보다 아예 잠이 오지 않았다. 칩을 하나씩 점검하면서 나는 적을 정복하기 위한 미로 여행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 미로 여행은 꼬박 사흘이 걸렸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사흘 동안 잠을 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찾아내어 완벽하게 돌려놓았을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등산가가 산의 정상을 정복한 것이나, 야전 사령관이 적군의 성을 빼앗아 입성한 것과 마찬가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니까 송혜련, 아니, 이제 아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녀가 나의 몰골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어이 없어 하였다. 뜨거운 물을 받아놓았으니 목욕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대로 쓰러져 하루 꼬박 잠을 잤다. 후에 아내의 말로는 목욕을 하게 하려고 아무리 깨웠지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PCMS 도스 버전 1.0의 개발은 1년 6개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것이 되지 못했고, 하나의 상품으로 시장을 점유하기에는 부족했다. 그 상품은 광명제어에 팔려나갔으나, 지속적인 계약 체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광명제어에서 받은 돈은 그 제품을 개발하는 비용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했고, 이미 개발자금으로 써버렸다.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컴퓨터의 붐이 일기 시작했으나, PCMS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없었다. 일단 그러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상품에 대한 광고가 없었던 것이다. 상품 시장에서 기술만 있고, 제품이 완성되었다고 하여도 그것을 팔 수 있는 시장의 확보가 없으면 소멸된다. 그 일은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공장을 찾아다니면서 설명하는 것으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다.
90년대를 전후해서 나에게는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쳤다. 그것은 PCMS를 개발하는 데 역점을 두었지만, 개발에 차질을 빚자 자금 압박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회사의 빚이 쌓이기 시작해서 단번에 5억원의 부채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