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엄용주의 영화읽기> 존 폴슨 감독의 「시암선셋」

독특한 유머와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영화. 「시암선셋」은 영화가 지니는 환상과 드라마의 자연스런 배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제목인 「시암선셋」은 주인공이 아내와 함께 타이 해변에서 본 노을빛에 붙인 이름. 색채연구가인 주인공이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색채이며, 동시에 불행한 운명을 행복으로 바꿔놓게 되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단편영화 감독과 배우로 활동해온 존 폴슨의 장편 데뷔작으로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수상작이다.

로드무비와 드라마, 코미디가 적절히 버무려지며 탄생된 이 영화는 뻔한 이야기 구조의 틀 속에서도 기대치 않은 매력을 발산한다. 적당히 무관심하며 적당히 자기중심적인 영국 남자와 그를 둘러싼 인물의 배치도는 우울하면서도 즐거운 세상살기의 이중적인 속내를 들춰보게 하며,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는 「광수생각」의 메시지를 전한다.

어느날 사랑하는 아내가 비행기 화물칸에서 떨어진 냉장고에 깔려 죽는다. 죽음은 슬프지만 「비행기에서 떨어진 냉장고」라는 사실이 타인에겐 폭소를 자아낼 만하다. 색채연구가인 페리는 아내를 잊지 못해 괴로워한다. 더더욱 그가 가는 곳엔 언제나 사람이 넘어지거나 새가 부딪쳐 죽거나 사고가 터져 페리는 자신이 사고의 원인이 된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머피의 법칙」을 몰고다니는 페리는 점점 자신이 하늘의 노리갯감이 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계속되는 악운 속에 어느날 그는 빙고게임에 당첨돼 호주여행의 기회를 얻는다. 회사에서도 휴직선고를 받은 그는 자신이 개발하려는 「시암선셋」에 대한 미련을 마음에 담은 채 호주를 횡단하는 고물버스에 몸을 싣는다.

호들갑스럽지만 인정많은 버스의 승객들과 부대끼며 험난한 여행을 계속하고 있을 즈음, 마약판매책이며 폭력적인 애인을 피해 도망가던 그레이스가 버스에 합류하게 되고 그녀는 페리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폭우와 지진 등으로 여행의 불운이 계속되자 불안감을 느낀 페리는 영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때마침 그레이스를 뒤쫓아온 남자친구가 버스에 승객으로 합류하고 고급버스와 경주를 벌이던 고물버스는 과속으로 부서져 사람들은 외진 사막의 더러운 모텔을 숙소로 정한다. 인정머리 없는 주인과 터무니없이 비싼 바가지 요금, 전화시설도 없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망연자실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새로운 사랑이 싹튼다.

「시암선셋」은 영화만들기의 강박관념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람이 살아있는 이야기를 한다. 이 영화가 갖는 힘은 테크놀로지나 톡톡 튀는 감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편안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유머에 있다. 그리고 그건 바로 고단한 세상살기의 해법인 셈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