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벤처밸리>벤처 이렇게 성공했다..

경북대학교와 한국과학기술원을 졸업한 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6년 전 창업했다. 올해 매출목표가 500억원이니 웬만한 중소업체는 능가하는 셈이다.

ETRI에서 함께 근무하던 주진천 박사(현 부사장)와 공동으로 정보통신의 한수 위인 하이퍼란 단어를 붙여 하이퍼정보통신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내걸었다. IMF체제가 오기 전 선발주자로 창업했기에 지금 돌이켜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고생을 안한 것은 아니다.

창업 초기엔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용역을 수주해 근근히 하루 벌어 살았다. 당시 몇 안되는 벤처업체들은 대기업의 의사결정이 최소 6개월에서 10개월씩 걸려 제안서를 내놓고 기다리다 망하기 십상이었다.

하이퍼정보통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6개월을 기다린 끝에 제안서 사인이 떨어졌지만 사업완료 시기가 제안 내용보다 4개월이나 이른 6개월이어서 이만저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회사 신용이 걸린 문제라 납기일을 맞추려 날밤 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회사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창업지원에 의해 협력연구개발기업으로 자본금 1억6650만원을 가지고 시작했다.

설립 당시는 정보통신 관련 개발용역 위주의 사업을 펴나갔다. 창업 초기 설립자본금은 대부분 사무실·비품·인건비 등으로 지출됐다. 지금이야 벤처창업보육센터가 있어 실용적으로 사무실을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지만 당시만 해도 상당히 열악한 상황이었다.

개발용역의 경우 대체로 개발완료 후 대금이 지불되기 때문에 재정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운영비를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연구인력을 최소한으로 하고 개발용역 수행을 밤낮없이 해대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가끔씩 직원들의 급여도 줄 수 없는 상황도 있었지만 서로가 믿고 의지하는 가족 같은 신뢰가 오늘날 성공의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제품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대기업 납품거래를 시작하면서 회사규모도 커져갔다. 신제품 개발과 R&D 투자에 몰두하고 안정적인 생산시스템을 구축한 이후부터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초기 사업은 통신시스템, 멀티미디어, 인터넷, 핸드폰 주변장치, 파워 및 ASIC 분야였으며 현재는 인터넷폰, ADSL 단말, PC카메라, 차량용 핸즈프리킷 등의 신제품 출시가 예정돼 있다.

벤처업체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마케팅이었다. 그래서 짜낸 것이 각종 전시회 참가, 서울 및 해외 지사 설립, 유통회사와의 연계 프로젝트다.

최근엔 테헤란밸리·포이양재밸리·대덕밸리 등 여러 벤처기업들이 군집을 이뤄 정보교류나 해외시장 공동대응 등 상호협력이 가능해졌다. 고독한 승부사보다 개미 열 마리가 낫다는 말을 당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