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동기식 표준이 필요하다.』 『무슨 소리냐, 세계시장을 공략하려면 오히려 점유율이 훨씬 높은 비동기에 치중해야 한다.』
『국가표준은 단일화해야 한다. 외국도 표면적으로는 복수표준을 선택했지만 정부가 사실상 단일화를 유도하고 있다.』 『아니다. 단일화는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꼴이다. 복수표준을 설정하고 시장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국가 기술표준 제정은 빠를수록 좋다.』 『표준 결정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가급적 늦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IMT2000을 둘러싼 표준논쟁이 불붙고 있다. 그간 물밑에서만 논의되던 이 문제가 사업 허가방식 결정을 코앞에 두고 공론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업자들은 물론 장비업계까지 총동원된 논리싸움은 10인 10색의 의견이 만발, 마치 백화제방을 연상케 하고 있다.
기술표준이 논쟁거리로 떠오르는 것은 저마다 상대방의 주장을 제압할 만한 논리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전화 경쟁 도입시 시분할다중접속(TDMA)과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을 두고 온나라가 편가르기를 해가면서 들썩거렸던 것의 재판이다.
◇ 업계의 엇갈리는 이해=논쟁의 이면에는 사업자별로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것이 어떤 것이며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어떤 접근방식이 요구되는지가 깔려 있다. 철저히 자사의 이해관계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비스와 장비부문에서 각각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SK텔레콤과 삼성전자는 내심 동기식 단일표준을 희망하고 있다. 어차피 세계 최일류 기업들과 경쟁하려면 이미 우리가 선점한 고지, 즉 CDMA를 기반으로 한 동기식이 좋다는 것이다.
지금도 루슨트·모토로라·에릭슨 등 거인들과의 싸움이 벅찬 판에 동기·비동기 모두를 개발하고 생산·판매하기는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럴 바에야 우리의 강점을 더욱 특화, 동기 시장만이라도 확실히 점유하고 비동기는 단계별로 공략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CDMA 단일표준 도입이라는 과거의 「도박」에서 성공한 사례를 원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택과 집중을 강조한다.
이와는 달리 서비스와 장비에서 이들과 양강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국통신·데이콤·LG정보통신 등은 복수표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IMT2000의 특징이 글로벌 서비스인 만큼 도박을 하기보다는 복수표준을 설정하고 시장이 판정하도록 하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세계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할 것으로 예상되는 비동기식을 외면할 수는 없고 해외진출을 위해서도 단일표준은 곤란하다고 밝힌다. 「도박은 한번이면 족하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 표준제정 시기=대부분의 관련업체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는 생각이다. 사업자 선정이 올 연말인데도 아직 표준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준비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결정될 일이라면 가급적 조기에 결단을 내려 개발 및 마케팅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미 일본이나 유럽업체들은 상용 시스템을 개발했고 내년에는 서비스에 나선다. 우리의 결정이 늦어질 경우 정작 서비스에 돌입하는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외국업체에 안방을 내줄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그때쯤이면 외국업체들은 시장에서 검증을 거친 이후라 한국시장 공략이 한결 쉬워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 열쇠 쥔 정통부의 고민=국가 기술표준을 제정해야 하는 정통부로서는 사업자 선정 못지 않게 딜레마에 빠져 있다. 자기 잇속만 챙기면 그만인 업체들과는 달리 정부가 고려하고 감안해야 할 변수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의 결정은 21세기 한국 정보통신산업의 향배를 결정지을 만큼 엄청난 파급효과가 예상된다.
정통부가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여론이 모아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표준논쟁의 각 주체들이 주장하는 이론이 저마다 설득력과 허점을 동시에 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느 한 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또다른 이유는 경제의존이 구조화된 미국과의 관계 때문이다. 당국자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최근 일본의 예를 보면 우리 정부도 이를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일본은 3개의 사업자를 선정하면서 당초에는 복수표준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장내에서의 자율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NTT도코모, DDI그룹, J-폰(지역사업자와 BT, 보다폰 등이 참여) 3개사의 신청이 확실시됐고 이 가운데 도코모와 J-폰은 유럽형인 비동기식을, DDI그룹은 북미형인 동기식을 선택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DDI가 북미방식인 동기식을 포기하고 비동기식으로 선회, 사실상 일본은 비동기 단일표준으로 가는 듯했지만 미국이 반발했다. 일본시장을 내주는 것은 물론 여타 국가에도 비동기 단일화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한 미국은 동기식의 선두기업인 퀄컴을 통해 사업권을 신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퀄컴은 MCI월드컴 및 일본내 파트너와 제휴, 일본의 IMT2000 사업권에 뛰어들 것으로 알려져 사업권 허가 판도에도 미묘한 변화가 예상되고, 사업권에 관한 한 이미 떼어논 당상으로 여겨졌던 3개의 기존 사업자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래서 정통부의 공식 입장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는 것이다. 안병엽 장관의 되풀이되는 발언이 이것이다. 정통부는 모든 변수를 스크린, 최선의 선택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시기와 방식에 대한 어떤 언질도 없다.
하지만 안 장관이 공사석에서 밝힌 내용 가운데 일부분은 국가표준의 방향을 어림잡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국가표준은 산업발전과 직결되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칠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특히 로열티 문제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이번엔 CDMA의 전철(퀄컴에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여론을 의미하는 듯)을 밟지 않기 위해 진을 모두 빼고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단말기 등 장비산업의 특성상 정부가 표준방식을 일정 부분 유도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안 장관의 이같은 언급으로 미루어 우리 정부는 로열티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국가표준 결정을 가급적 뒤로 늦추는 한편 일본처럼 복수표준을 채택하더라도 장비업계에 대해서는 사실상 단일표준을 유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