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H교수는 요즘 20여년간의 교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교수 이전에 과학자요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 정의를 교육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 착잡한 심경은 말할 것도 없고 연구실로 향하는 발걸음마저 무겁기 그지없다.
우수연구센터 선정 심사에서 탈락하고 나니 학생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가 아니라 창피하기까지 하다는 H교수. 1차 심사에서 탈락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지만 나서서 불만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평가시행기관인 재단에 성적을 공개하라고 주문할 입장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 또한 심사를 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 광운대 H교수는 『우수공학센터 선정 심사에 응모하기 위해 지난 몇년간 연구역량과 아이디어를 결집하여 이만하면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고 지원했는데 탈락하고 나니 허탈하다』며 『학교는 물론 동료교수와 연구실 석박사 학생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과학재단에서 10년간 매년 9억원씩 지원하는 우수공학연구센터와 우수과학센터 선정에서 탈락한 교수들의 자괴감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교수들의 가장 큰 불만은 센터 선정을 위한 평가방법이다.
과학재단은 예비계획서와 본계획서로 나눠 4단계로 평가하고 있다.
예비계획서의 경우 센터사업으로서의 적합성, 연구계획의 우수성, 연구집단의 우수성, 기존 센터와의 중복성 등을 100점 만점으로 하되 최고·최저 점수를 제외한 평균점수를 반영하는 토론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분야별로 최종 센터수의 4배수를 결정하게 되는 것.
본계획서에서는 1단계 서면평가 100점과 2단계 발표평가 100점, 3단계 현장방문 평가 50점을 종합해 기초과학실무위원회가 심의하고 정부가 최종 선정토록 되어 있다. 다만 단계별 점수 비중은 재단측이 공개를 꺼리고 있다.
22곳을 선정하는 올해 156곳이 지원했다. 예비계획서 평가로 76곳을 선정하고, 다시 본계획서 서면평가를 통해 42∼45곳을 선발한 후 현장방문 평가를 거쳐 최종 선정하게 된다.
그러나 본계획서 1차 심사의 경우 서면평가로 이뤄져 교수 자신들의 연구역량이나 가능성을 제대로 알리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성적이 공개되야 한다고 지적한다.
센터의 연구목표-연구개요-인적사항 및 대표업적 등 간략한 문서 몇 장으로 수십년간 연구해온 자신들의 성장 잠재력과 능력을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에 성적을 요구하는데 이를 공개하지 않아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광운대 H교수는 『우수연구센터 선정의 1차 과정 통과는 서류를 얼마나 잘 구성하느냐가 좌우한다』며 『서류작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실토한다.
그러나 우수연구센터의 선정을 주관하는 과학재단의 입장은 또 다르다.
인력풀을 구성해 분야별로 뽑아놓은 심사위원들이 성적을 공개하면 심사를 하지 않겠다고 들고 일어선다는 것. 성적이 공개되면 객관적이고 양심적인 심사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주장이다. 심사대상이 동료나 선후배인데 자신이 책정한 점수가 드러나면 입장이 곤란해져 심사 이후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논리다.
더욱이 엄정한 4단계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점수계산에서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하는 것이 양심적인 평가자의 의견을 무시하는 줄 알면서도 실시할 정도로 최선을 다한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계가 매년 우수연구센터 선정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아 답답하다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불만이다.
지난 4월만 해도 올해 우수연구센터 선정을 둘러싸고 일부에서 반발해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는 없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세부사항에 대한 심사기준이나 예외규정에 대한 지침이 주먹구구식이라는 도덕적인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K교수는 과학재단 본부장을 지내다 학교로 복귀한 뒤 수년간 우수연구센터 연구계획서를 제출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올해의 경우는 모교수가 재단의 전문위원직이 종료되자마자 센터신청을 내 1차 심사를 통과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재단측은 『자격조건을 갖추고 있어 불가피한 조치였다』며 『엄밀하게 하자가 없고 센터선정에 떨어진 교수들의 불만을 다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고려대 H교수는 『1차 심사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는 부분을 도대체 알 수가 없다』며 『A4용지 10여장으로 이루어진 신청서만으로 정확히 평가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심사위원을 비공개로 진행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평가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이 공개되지 않는 데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연구센터 선정과 관련해 공개 혹은 비공개 여부가 문제의 핵심은 분명 아니지만 엄격하고 공정한 심사를 위해 평가결과에 대한 객관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지난 3월 우수센터 선정을 위한 1차 평가 발표 후 거세게 반발했던 P교수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와 관련, 서울대 L교수는 『우수연구센터 또는 우수과학센터에 지원하는 금액은 웬만한 사립대학의 1년 연구비 총액을 넘는 큰 액수』라며 『심사내용과 가중치를 공개하고 심사를 위해 구성돼 있는 전문가 인력풀을 보다 원활히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과학기술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