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언어로 만들어진 최초의 장편영화. 「컵」은 중국의 탄압을 피해 인도로 건너온 티베트 사원의 스님들이 실제 주인공이다. 감독인 키엔츠 노부 역시 티베트의 불교지도자이며 승려 출신. 「컵」의 매력은 스님과 월드컵이라는 소재의 충돌에서 오는 유쾌함과 현재 티베트의 모습을 읽게 하는 진실함에 있다. 외래문화는 항상 「개방」이란 미명하에 고유한 전통문화를 위협하는 요소로 다가오며 세대간의 갈등으로 그 불화의 골이 깊어지게 마련이다. 폐쇄사회에 도전하는 개방의 물결, 그 개방을 맞이하는 전통의 노련함, 영화 「컵」은 이 조율을 탄력 있고 유머러스하게 이끌어간다.
히말라야산 중턱에 위치한 사원,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스님들의 정진이 한창이다. 속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이 곳에도 어김없이 전세계적인 월드컵 열풍이 몰아친다. 중국에 점령당한 티베트를 탈출한 소년들이 이 사원에 도착한다. 달라이 라마의 뒤를 이어 승려가 되기 위해 사원에 당도한 두 소년.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사원에 있는 스님들은 엄숙함이나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린 수도승들은 입으로는 불경을 외우면서도 눈으로는 축구잡지를 훔쳐보고, 모두가 잠든 사이를 틈 타 서슴없이 월장을 하면서까지 마을에서 축구경기를 보고 돌아온다. 특히 같은 방을 쓰게 된 오기엔의 축구사랑은 가히 열정적이다. 그는 자신과 머리 스타일이 같은 호나우도를 좋아해서 승려복 밑에 그의 등 번호를 새긴 속옷을 입고 있을 정도다. 스님들은 틈이 날 때마다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 코카콜라 캔으로 축구경기를 한다. 월드컵의 열기가 히말라야 사원 곳곳에 퍼진 것이다. 마침내 프랑스와 브라질의 결승전, 이 경기를 놓치면 4년을 기다려야만 하는 오기엔은 사원 내에서 결승전을 볼 수 있도록 어른스님을 졸라 허락을 받아낸다. 그러나 TV와 안테나를 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일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경기 중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남과 싸워 이겨야 하는」 스포츠의 세속적인 생리와 세상과 등을 돌린 「수행의 삶」이 교묘한 접점을 이루면서 삶에 대한 따뜻하고 현명한 성찰의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가 더욱 의미있는 것은 티베트의 시선으로 그려진 티베트의 현실이란 점. 그 동안 티베트를 소재로 한 장 자크 아노 감독의 「티벳에서의 7년」, 마틴 스콜세지의 「쿤둔」 등은 모두 할리우드의 시각에서 본 소재주의에 그쳤으나, 영화 「컵」은 한결 온화한 은유의 방식으로 중국에 의해 전복되어진 티베트의 현실과 정치적인 관계를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