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중소기업들이 정보화를 적극 추진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중소기업체 사장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먼저 지적하는 문제는 『돈이 없다』는 것. 급속도로 변하는 시장환경에 맞춰 최신 설비와 기술개발에 투자하기도 빠듯한 상황이라 『정보화는 언감생심』이라며 고개를 내젓기 일쑤다. 여유자금이 없으니 정보화는 꿈도 못꾼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중소기업들이 정보화 투자에 소극적인 이유가 돈이 없어서일까.
중소기업체의 정보화 및 경영지도에 오랫동안 몸담아 온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돈이 없다는 말은 핑계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전문가들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산이 없는 것』이라며 『정말 돈이 없다면 사업은 어떻게 하며 직원들 월급은 어떻게 주겠느냐』고 반문한다.
전문가들은 또한 『중소기업에서는 정보시스템 구축이 투자의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리는 데다 애시당초 예산 항목 중에 포함되지도 않는다』며 『정보화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자금확보는 시간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국내 중소기업들은 정보화 투자에 인색하고 최소한의 범위에서만 예산을 배정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일부에서는 정보화 명목으로 정부자금을 받아놓고도 땅투기 등 엉뚱한 곳에 자금을 쓰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중소기업들이 정보화 투자에 인색한 것은 무엇보다 정보시스템 구축을 통해 효율성 제고와 매출향상 등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 전세계의 주요 기업들이 정보화에 대한 빠른 투자를 통해 얼마나 많은 소득을 얻었는지 귀가 따갑게 들어왔으면서도 막상 투자를 결정할 상황이 되면 『그래도 우리는 중소기업인데…』라며 어깨를 움츠린다.
이에 대해 중소기업진흥공단 경영정보화지도실의 김영운 부장은 『정보시스템 구축이 비용 측면에서도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중소기업체 사장들의 정보화에 대한 의심을 흔들어놓고 있다.
예컨대 현재 생산직 70명, 관리직 30명으로 연간 1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기업이 1년뒤 매출액을 200억원으로 올리려면 관리인력은 최소한 10명 이상 늘려야 한다. 한 사람당 인건비를 평균 3000만원으로 계산하면 1년에 3억원이다. 그러나 정보시스템 구축비용은 이 정도 규모에선 1억5000만원이면 족하다. 관리인력 10명을 추가로 뽑지 않고 정보시스템 구축만으로 1억5000만원이 절약되는 셈이다.
더구나 유휴 관리인력은 기존에 해왔던 정보수집과 정리 등 단순업무에서 벗어나 더 많은 시간을 정보의 다각적인 분석과 고급정보 획득 및 재가공 등에 사용할 수 있게 되며 재고와 협력업체 상황 및 시장현황 등을 더욱 빨리 파악할 수 있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대효과가 있다고 역설했다.
물론 중소기업이 정보시스템 구축을 통해 실질적으로 효과를 본 사례가 적으므로 선뜻 투자에 나서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성공사례가 드무니 보고 배울 수도 없고 먼저 나서자니 실패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체 전산실장들이 하나같이 『성공사례나 비교검토 대상이 없이는 적잖은 자금이 소요되는 정보시스템 구축에 대해 사장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중소기업에도 정보화 성공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전기밥솥 제조업체로 TV광고까지 하며 성가를 높이고 있는 성광전자의 경우 15년 전부터 정보시스템 구축에 나서 지금은 자재구입·물동량조사·매출동향파악 등 각종 정보업무를 거의 실시간 단위로 진행하고 있다. 공장이 있는 경남 양산의 본사와 서울 영업소간에 의사소통도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지며 조만간 전자결제와 ERP시스템 가동도 기대하고 있을 정도. 동종 업계보다 한발 이른 정보화 시스템 도입에 따라 성광전자는 빠르고 정확한 정보력과 시장예측력을 배가시킬 수 있었고 덕분에 현재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삼성과 LG를 제치고 전기밥솥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회사 전산실장은 『중소기업의 정보화 투자가 소극적인 데는 경영자뿐 아니라 전산담당자의 의지부족도 한몫을 하고 있다』며 『중소기업의 정보화 관련 최신정보를 입수해 철저히 비교검토한 후 시스템구축 계획과 예산을 요구해야만 경영자의 반문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영자가 정보화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거나 확신이 없어 예산을 무턱대고 줄이려 할 경우 전산담당자가 설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반면 이렇게 정보화에서 앞서가는 성광전자도 매년 정보화 예산을 정기적으로 편성하고 있지는 않으며 자금력이 탄탄함에도 불구하고 초기투자비에 대한 부담을 느껴 중소기업진흥공단의 구조개선자금을 활용했다.
중견 가전업체인 신일산업·부방테크론·오성사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 80년대 중후반부터 전산실을 만들고 네트워크 구축작업을 시작한 이들이지만 매년 예산을 책정하지 못하고 공공자금을 활용했다.
그러나 공공자금이 정보화에 국한된 자금이 아닌 포괄적인 지원자금인 까닭에 너도나도 신청을 하면서 자금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IMF 이후 담보조건과 이율이 높아져 영세한 중소기업에는 공공자금마저 따내기가 쉽지 않은 형국이 됐다.
사정이 이러하니 은행이 아닌 벤처캐피털 같은 투자업체를 물망에 올리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대세다. 한 중소기업체 사장은 『벤처캐피털은 속성상 이익실현 후 바로 빠져나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당장 자금이 들어올 땐 좋을지 몰라도 결국은 회사자금이 빠져나가게 된다』며 『고위험 고수익의 벤처산업이면 몰라도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이익이 나자마자 빼내간다면 아예 처음부터 받지 않는 게 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꾸준히 수익성을 올리고 있는 전통 제조업체에 눈길을 돌리는 벤처캐피털리스트도 하나둘 고개를 들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중소 제조업체들에는 아직 먼 얘기인 게 사실이다.
중소기업체의 한 전산담당자는 정보시스템 투자가 매년 매출의 6%선은 넘어야 제대로 가동·유지·개선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정도는 돼야 빠듯하긴 해도 정보시스템이 매년 늘어나는 정보량에 대한 관리 및 분석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여유자금 생기면 하지」 「남들 하는 거 보고 잘 된다면 그때 하지」 「남들 하는 만큼만 하지」류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정보화에 성공할 수 없다.
중소기업들이 최소한도의 소극적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어내는 대기투자 등 인색한 투자마인드를 고수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다시 정보부족으로 돌아간다. 정보가 부족해 정보화 투자를 제대로 못하는 것이니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격이다. 이는 정보화를 미루면 미룰수록 정보에 뒤지게 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정소영기자 s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