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삼성SDI 독일 공장 대북 진출의 참고서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사업에 대한 국내 전자업체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나 정작 북한 진출에 대해선 불안감을 갖고 있다. 투자환경이 불확실한데다 구체적인 정보 또한 없어 투자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주의국가인 북한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회경제체제를 갖고 있어 접근 방식도 전혀 달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점에서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구 동독에 투자한 삼성SDI의 경험은 좋은 참고서가 될 만하다. 특히 삼성SDI 사례는 통독 이후에 발생한 문제와 씨름해온 것이어서 남북 통일 이후 전자업체들의 대북 투자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편집자

삼성SDI(구 삼성전관)가 구 동독의 독일 공장을 인수하기로 한 것은 지난 92년 9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3년 가까이 지났으나 갑작스런 통일로 인한 사회 혼란이 극심한 시기였다. 동독인의 경우 서독에 비해 낮은 사회·경제적 수준으로 상대적 박탈감이 심각했다. 당시 독일 정부는 동베를린 동남쪽 15㎞ 지점에 있는 동독 최대의 종합전자업체인 WF사를 해외에 헐값에 매각하려 했다. 독자 경영이 힘든데다 고용 안정을 위해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게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일부 유럽과 일본 업체들이 이 공장의 인수를 검토했다가 결국 포기했다. 투자조건·기술·입지가 모두 좋으나 낡은 경영에 따른 낮은 생산성으로는 도저히 경쟁력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독일 신탁청의 인수 제의는 삼성SDI에도 왔으며 삼성SDI는 오랜 고민끝에 인수를 결정했다. 독일 정부의 자금지원 등 투자조건도 괜찮은데다 삼성전자·삼성코닝 등 그룹 관계사의 현지시장 진출에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삼성SDI는 곧 후회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낡은 생산설비에다 초보적인 조직운영과 종업원의 의식수준을 보면 도저히 기업이라 할 수 없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삼성SDI는 눈물겨운 사투를 벌였다. 우선 설비부터 바꿨다. 지난 96년까지 4년 동안 쏟아부은 금액이 500억원이다. 그릇된 공정도 개선했다.

그래도 생산성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오랜 사회주의 생활에 찌든 직원들의 의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 법인장을 맡았던 김인 전무는 『명령대로만 행동하는 수동적인 태도, 책임을 지지 않는 풍토, 부서간 협조는 물론 업무보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하나에서 열까지 일일이 챙겨야만 했다』고 회고했다.

그렇지만 동독인은 거짓이 없으며 순수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서독인 가운데는 「촌스럽다」 「꽉막혔다」면서 동독인을 비꼬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동독인 가운데 서독인을 험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만 동독인은 「프랑크푸르트에 갈 때 서독에 간다」고 말할 정도로 잠재의식속에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또 동독인은 몸이 아파도 서독 의사에게 가려 하지 않는데 이는 서독인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는 게 익숙지 않아서라고 한다.

삼성SDI는 동독인이 체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렇지 순진하고 우직하다고 보고 이들을 조금 더 체계화하면 효과가 높을 것으로 봤다. 이같은 판단은 주효했다.

삼성SDI는 우선 동독인의 피해의식을 덜어주기 위해 가능하면 서독인을 채용하지 않았다. 당장의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인원 감축도 절실했으나 이를 최소화했다.

관리부문에서는 경리·인사 등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위탁교육을 이수한 현지인 간부들을 배치해 이들의 자존심을 살렸다. 현지인 간부 비율은 60%에 이른다. 또 독일인 특유의 합리성과 능동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현지인 중심의 청년 중역회를 만들었고 정기적으로 노사협의를 가졌다.

마케팅은 물론 생산현장에서도 현지인들이 싫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경쟁체제를 도입했다.

더디기는 했으나 생산성도 향상돼 올 초 생산성이 인수 당시에 비해 3배 이상 뛰었다. 생산성이 높아지자 인건비 부담도 줄어 인력을 크게 감축할 필요도 없어졌다. 종업원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인수 이후 적자였던 이 공장은 비로소 지난해 하반기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인수한 지 5년만이다.

통상 적자 기업을 흑자 기업으로 바꾸는 데 이 정도가 걸리나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빠른 셈이다.

삼성SDI가 이 공장을 인수할 당시 동독에 투자했던 세계 유수의 자동차·전자 업체들은 상당수가 손을 뗐다. 이들 기업의 투자 실패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투자의 효율성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현지인들의 의식구조에 접근하지 않은 것이 주요인이라는 분석을 낳고 있다.

지난해까지 독일공장에서 근무했던 윤재민 삼성SDI 부장은 『오랜 적자에도 불구, 이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그룹 관계사와 현지 대형 거래처를 판로로 확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지 종업원들과의 의식 공유에 따른 성공에 대해 확신하게 된 것도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