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쯤 됐을까. 만찬이 끝나갈 무렵 사촌여동생과 만날 장소가 고려호텔에서 청련호텔로 변경됐다는 전갈을 받았다.
청련호텔에서 해주를 만난 것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정상회담의 결실인 남북공동성명에 서명을 하고 있을 때였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호텔에서 자축연을 벌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해주는 하루 전에 와서 기다린 듯했다. 북측에서 상당한 배려를 해준 흔적이 여기 저기 묻어났다. 우리 남매의 만남을 축하해주기 위해 차려놓은 상도 상당히 푸짐했고, 우리가 만나는 순간부터 안내원이 비디오도 찍어주고 내 카메라로 사진도 찍어줬다.
하지만 53년만에 만나는 해주와 나는 처음에는 굉장히 서먹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나도 그랬지만 그녀도 내 얼굴에서 핏줄의 흔적을 찾아보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고향을 떠나온 게 14살 때였고 해주는 나보다 2살 아래인 12살이었다. 그렇게 서로 어린 나이에 헤어졌다가 지금은 얼굴에 검버섯이 잔뜩 서려 있는 노인이 돼서 다시 만났으니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53년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건만 그동안 우리를 갈라놓았던 세월의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니가 해주 맞느냐』고 물어보자 해주는 큰아버님과 큰어머님, 또 선산에 대한 얘기며 할아버지 묘소 위치 등을 알려줬다. 독립운동가셨던 할아버지는 러시아에서 돌아가셨다. 『맞다. 니가 해주구나.』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해주와 나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진하게 밀려들었다.
그동안에는 해주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으나 정작 만나서 서로를 확인하고 나니 어릴 적에 남대천이며 명절 때 산소가는 길에서 놀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가족의 생사를 물었다. 나와 가장 친했던 성애 누님은 6·25전쟁 당시 폭격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보다 2살 위인 성애 누님은 나에게는 가장 많은 기억이 남아있는 누이였다. 그런 누님이 전쟁통에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다니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무너져내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해주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만나니 꿈만 같다며 내 손을 부여잡은 채 한없이 울기만 했다.
사촌형님과 동생 등 남은 형제들은 아직도 고향 신포리에서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내 고향 신포리는 생선이 맛있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내가 김재철 무역협회 회장에게 『신포 생선이 맛있으니 거기 가서 공동으로 어업을 해보면 좋겠다』고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 회장의 동원참치가 신포에 진출하면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준비해온 사진을 주고받으며 옛날 이야기며 그동안 지낸 얘기 등을 나눴다. 우리에게 주어진 1시간은 지난 50여년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짧았지만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조만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이번 방북기간 만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상당히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여럿이 몰려가 술을 청해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좋다며 거리낌없이 술을 따라주고는 함께 마시자고 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김정일 위원장의 이같은 심성을 생각하니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우리 수백만 이산가족에게도 큰 기쁨과 기대를 가져다준 성공적인 만남이었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15일 환송만찬을 마치고 우리는 평양을 떠났다. 우리가 탄 대한항공 특별기는 김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을 태운 공군 1호기가 이륙한 지 15분쯤 후인 4시30분께 평양을 떠났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북한 들녘은 너무나 깨끗했다. 하늘도 이번 방북을 통해 밝아진 나의 마음 만큼이나 맑고 청명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8·15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참여하기 위해 신청서를 냈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다진 서로간의 우의를 생각하면 우리 이산가족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는 기대감이 가슴속에 충만해져오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