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는 아날로그 전문가를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이승훈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최근 전자업체로부터 아날로그 전문인력을 찾아달라는 요청이 부쩍 늘어났지만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새 천년, 누구나 서슴없이 말하는 「뉴 밀레니엄 디지털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아날로그」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단순한 호기심의 수준을 넘어 아날로그는 디지털 시대를 제대로 열어젖히는 핵심기술로 각광받고 있다.
도대체 아날로그가 뭘까. 아날로그가 자연적이라면 디지털은 기계적이다. 인간과 컴퓨터의 차이다.
컴퓨터는 모든 것을 0과 1로 처리하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둘로 쪼갠 다음 다시 통합해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듣고 보며 말한다.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 된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아날로그 세상에서 산다.
이를테면 디지털TV의 경우도 입력된 신호는 아날로그다. 이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시킨 후에 출력단계에서는 다시 아날로그로 내보내야 한다. 인간은 디지털 신호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디지털 신호처리 기술이 뛰어나도 아날로그 신호와 원활하게 교류하지 못하면 그 디지털 기술은 제구실을 못한다. 디지털 제품에는 아날로그 기술과 부품이 반드시 필요하다.
전자제품의 디지털화가 진전할수록 아날로그 기술과 부품의 개발도 이에 걸맞은 수준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최근 반도체업체들은 여러개의 칩을 한개의 칩으로 통합하면서 디지털 처리영역과 아날로그 처리영역을 결합한 혼성모드 제품의 개발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통신기기업체들도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기 힘든 고주파(RF) 분야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아날로그 기술 및 아날로그 부품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있다.
더욱이 최근 각광받는 바이오 산업과 생명과학 분야에서 아날로그 기술의 비중은 오히려 디지털 기술을 능가한다.
이 때문에 선진국의 전자정보업체들은 아날로그 전문가에게 디지털 전문가에 비해 두배 정도의 연봉을 주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아끼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이와 딴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전자업체들이 디지털 기술인력만 찾았지 아날로그 인력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최근에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허겁지겁 아날로그 인력을 구하고 다니지만 그동안 방치된 교육으로 키울 「풋내기」조차 찾기 어렵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일부 대학생들 사이에 아날로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배울 곳도, 가르칠 선생도 없다. 기업에 들어가도 당장 짧은 기간에 돈을 만질 수 있는 디지털 기술부터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아날로그라는 기초를 뗄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국내 디지털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나 핵심기술의 개발은 제자리를 맴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아날로그의 원천기술을 쥐고있는 외국업체에 막대한 로열티를 물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아날로그와 같은 기초기술에 대한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임신일 서경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국내 전자·정보통신산업이 균형있게 성장하고 경쟁력을 갖추려면 디지털 기술의 발전 못지않게 아날로그 기술을 발전시켜 「디지털과 아날로그 융합의 시대」에 적극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임 교수는 디지털 기술을 전공했다가 최근 아날로그 기술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연구개발에 깊이 빠져들었다.
아날로그 기술수준은 곧바로 디지털 전자제품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국내 디지털 기술수준은 선진국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했으나 아날로그 기술수준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디지털 제품을 세계 곳곳에 판매하는 우리나라가 주요 아날로그 부품은 대부분 수입해 쓰는 실정이다.
아날로그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 없이 디지털 시대에서 강자로 남을 수 없다.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아날로그 기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의 힘을 배가시키는 것은 곧 아날로그 기술이라는 지적이다.
「자연에는 비약이 없다」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우리 전자산업에 곧바로 적용된다. 기초보다는 응용에서 시작한 우리 전자산업은 선진국과 달리 윗몸만 기형적으로 크게 진화했다.
최근 산·학계에 부는 「아날로그 다시 보기」 바람은 아날로그 자체 보다는 우리 전자산업을 처음부터 다시 보려는 시도와 다름아니다.
<김성욱기자 sw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