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재발견> (5·끝) 아날로그의 미래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ISSCC(International Solid State Circuits Conference)의 지난해 행사에서 발표된 총 173편의 논문 가운데 아날로그 관련 논문은 절반에 가까운 75편에 달한다.

이는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디지털 세상에서도 아날로그는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며 앞으로도 디지털과 함께 공존할 기술이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세계학회에 발표되는 아날로그 관련 국내논문은 한해에 고작 3∼4편에 그쳐 열악한 국내 아날로그 기술기반이 드러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국내 아날로그 기술의 미래는 물론 디지털 정보산업의 앞날도 결코 밝을 수만은 없다.

한국애질런트의 이형규 과장은 『혁신적인 소자에는 반드시 아날로그 기술이 필요하다』며 『우리나라가 인터넷·통신 강국이 되려면 반드시 아날로그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가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분야로 디지털 기술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메모리 역시 고도의 아날로그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국내 업체들의 지속적인 시장우위를 장담할 수 없다.

현대전자의 이찬희 이사는 『데이터 처리속도가 빨라지면 반드시 아날로그 방식으로 설계가 이뤄져야 한다』며 『각각 1㎓, 1백㎒ 이상의 고속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램버스D램과 싱크로너스D램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아날로그 기술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이 분야를 등한시하는 것은 유행에 민감한 국민성도 일조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동국대의 송민규 교수는 『아날로그는 인터넷이나 웹 같이 눈앞에 보여줄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이 분야를 전공하라고 선뜻 권유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디지털에 밀려 천대받고 있는 아날로그 기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계에 다다른 기술이 아니다.

시장조사 전문기업인 데이터퀘스트는 지난해 아날로그 시장이 약 210억달러에 달했으며 특히 이 가운데 70억달러 규모인 고성능 아날로그 시장은 향후 5년 동안 연평균 25%의 고성장을 구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예상되며 그 가운데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이 혼성(믹스드) 모드 분야다.

전문가들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따로 구분하기보다는 이들을 조화시키는 기술에 주목해야 하며 앞으로 혼성 모드 설계가 각광받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날로그 분야의 세계 최고 기업인 텍사스인스트루먼츠의 해리 다부디 혼성신호 DSP 솔루션 담당 부사장은 자사 홈페이지의 디지털 사보에서 『과거 시스템 설계시 아날로그 및 혼성신호 기능에 대한 고려는 디지털 중앙처리장치 섹션을 디자인한 다음의 문제였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은 하나의 칩에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능을 동시에 설계하고 제조하는 것은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에 통신 및 가전 시장에 진입하고자 하는 반도체 업체들에게 혼성모드 기술은 커다란 기술 장벽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을 정도다. 이 혼성모드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의 가치는 갈수록 빛을 발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아날로그 분야에서도 인터넷이나 웹처럼 미래 기술로 주목을 받는 기술이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팰러앨토에 있는 미래연구소의 폴 사포가 창안한 아날로그 컴퓨터(MEMS)는 머지 않은 장래에 상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날로그컴퓨터는 이분법적인 디지털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외부의 자극들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센서로 반도체 칩에 내장된 센서·밸브·기어·반사경·구동기 등과 같은 초소형 기계장치와 컴퓨터를 결합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난기류를 만났을 때 스스로 모양을 바꿀 수 있는 비행기 날개, 사람의 체형을 고려해 최적의 모양으로 변하는 의자, 취급자에게 말하는 소포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할 수 있다.

사포는 「아날로그 컴퓨터가 앞으로 10년 동안 컴퓨터 분야의 핵심 기반기술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국내에서 이와 관련한 연구개발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아무리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아날로그는 없어서는 안될 기술이기 때문에 꾸준한 연구개발과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아날로그는 통신·항공·우주·통신·국방 등 국가 기간산업의 기반기술이기도 하기 때문에 기술자립이라는 측면에서도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황도연기자 dyhw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