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진의 독서산책>미래로 가는 길

「미래로 가는 길」

빌 게이츠 지음

빌 게이츠. 한때 필자도 대스타인 그를 열렬히 흠모(?)하던 열성팬이었다. 그의 스타 기질은 그가 세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던 94년 12월 서울 롯데호텔의 기자회견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내가 번 돈이 얼마인지 세어본 적이 없고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비전을 갖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보니 돈이 벌린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으리라. 순진했던 필자는 그 순간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그는 이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비저너리다!』

빌 게이츠가 서울을 다녀간 몇 달 뒤, 그러니까 95년 4월경 한국의 출판계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쓰기로 했다는 어떤 책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집필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 판권이 한 출판사에 의해 800만달러에 입도선매되기도 했던 책이었다. 한국의 출판업계가 가만있을리 만무했다. 2만달러부터 시작된 낙찰금액은 판권 경쟁자가 많아지면서 몇 차례 소동을 겪으며 무려 25만달러까지 치솟았다. 이 금액을 써낸 출판사는 그의 인기를 감안한다면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계산했음이 분명했다. 배경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 출판된 빌 게이츠의 첫 작품이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이다.

「혁명이 시작된다」로 첫 장이 시작되는 이 책은 마지막 12장 「황홀한 여행」에 이르기까지 온통 혁명에 관한 메시지로 채워져 있다. 혁명은 곧 미래로 가는 여행이며, 그곳에 이르려면 정보기술에 의해 닦인 정보고속도로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표현방법만 달랐지 「메가트렌드」의 존 나이비스트, 「정보화사회」의 제임스 마틴 그리고 「제3의 물결」의 앨빈 토플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미래학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이미 한번씩 우려먹었던 이야기들이 아닌가.

물론 그가 책을 쓰기 전 선배들의 존재를 몰랐을리는 없다. 그래서 그는 선배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부각시키기 위해 책의 곳곳에 수많은 안전장치를 심어놓는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예언들이다.

『정보고속도로가 완성되면 당신은 전세계의 상품과 서비스를 느긋하게 검색할 것이다.』

『정보고속도로에 연결된 공공도서관은 누구나 들어와 첨단기기를 이용해 풍요로운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막상 하고 보니 예언이 너무 밋밋하고 평범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책의 머리말에 슬쩍 또 하나의 안전장치를 심어놓는다. 제법 강력한 것이다.

『나의 책이 앞으로 10년 안에 반드시 눈앞의 현실로 다가올 것을 미리 이해하고 논의하고 또 거기에 창조적인 사고를 덧붙이는 자극제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생긴다. 미래로 가는 길인 정보고속도로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독자들은 십중팔구 그것이 인터넷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백미이자 압권에 해당되는 다음 인용구절을 보자.

『나는 정보고속도로의 미래가 밝다고 본다. 지난 몇 년 동안 급성장한 인터넷의 경우만 보더라도 정보고속도로상의 각종 응용소프트웨어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리라고 본다. 인터넷은 표준화된 프로토콜 아래 서로 연결된 컴퓨터 집단을 기리키는 말이다. 정보고속도로가 되기에는 아직 까마득하지만….』

그가 정말로 자신의 발끝까지 다가온 인터넷 혁명을 감지하지 못했을까. 비평가 마이클 루이스는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 쓰기가 모두 연막이었다고 꼬집는다. 새로운 것 앞에서 존망의 위기에 몰렸던 마이크로소프트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는 기존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기존 방식은 결국 인터넷에 밀려 실패한 마이크로소프트네트워크(msn)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 책을 처음 읽은 4년 전부터 필자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짜로 순진할 것일까.

<논설위원 jsu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