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용주의 영화읽기>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류승안 감독의 「단편 모음」 혹은 그의 「최초의 장편」이라고 불러야 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16㎜로 극장에 개봉되는 영화지만 관객들에게 그 열악함을 수그러뜨리게 하는 매력이 있다. 총 4부로 구성된 이야기 중 98년 부산단편 영화제에서 우수 작품상을 받은 「패싸움」과 99년 한국 독립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현대인」에 이어 새로이 두 가지의 이야기가 만들어져 삽입되었다. 전주영화제에서 관객들과 평단의 호평으로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는 저예산 독립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각기 4편의 장르와 주제는 달라도 「홍콩영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답게 그들을 관통하는 영화언어는 「하드보일드 액션」이다. 감독은 「저예산 싸구려 영화」라 말하지만 그러한 제작상황이나 방식은 역으로 이 영화를 신선하고 맛깔스럽게 만드는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한다. 4가지의 이야기들은 각기 단편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장편영화가 지니는 내러티브 속에 조화를 이루어 낸다.

첫번째 에피소드 「패싸움」은 10대를 바라보는 기성 세대의 고정관념이 간간이 증언되면서 당구장에서 벌어지는 10대들의 싸움을 보여준다. 공고에 다니는 석환과 성빈은 그들을 「공돌이」라 비웃는 예고생 현수 일행과 싸움이 벌어지고 성빈은 실수로 현수를 살해한다. 호러의 장르를 차용한 두번째 에피소드 「악몽」은 살인죄로 소년원과 감옥을 전전하던 성빈의 출소 후의 이야기를 한다. 성빈은 밤마다 죽은 현수의 악몽에 시달리고 경찰이 된 친구 석환은 성빈을 피한다. 우연히 폭력조직의 중간보스 태훈을 도와주게 된 그는 주먹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다큐와 드라마가 접목된 세번째 에피소드 「현대인」은 폭력조직의 중간보스 태훈과 잠복근무 중이던 석환의 대결. 폭력을 쓰지만 각자의 논리와 애환이 있는 두 사람의 대결구도가 영화 중에서 가장 익살스럽게 표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네번째 에피소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는 문제아로 찍힌 석환의 동생 상환이 조직의 보스가 된 성빈을 찾아간다. 성빈은 당구장 사건을 떠올리며 상환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그를 다른 폭력배와의 싸움에 희생양으로 내보낸다.

동생의 일을 알게 된 석환은 성빈을 찾아와 둘 사이에 존재한 원한의 종지부를 찍는다.

4편의 이야기는 세련된 형식을 차용하진 않았지만 주연과 조연의 영역을 넘나들며 각기 에피소드를 꾸려가는 배우들의 신선감은 오히려 만만치 않은 재미를 던져준다. 고등학교만 나와 독학으로 영화계에 입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각본, 감독, 주연, 무술감독의 크레디트를 단 류승안 감독의 역량은 그 자신의 이야기만으로도 당분간 화젯거리가 될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