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개발해 공급하려 해도 구매 담당자가 만나주려 하지 않는데 어떻게 국산 부품의 경쟁력을 얘기합니까.』
『채 1달러도 안되는 부품을 교체해 제품의 신뢰성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부품업계와 세트업계 사이에 새로운 부품의 공급을 놓고 이처럼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부품업체들은 『세트업체가 부품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아 진입장벽이 높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반면 세트업체들은 『부품업체들이 검증도 안된 제품을 사달라고 졸라대기만 한다』고 말한다.
한 세트업체의 관계자는 『부품 국산화도 좋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사용하는 외산 부품을 국산품으로 바꿨다가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쓸 구매담당자는 없다』고 귀띔한다.
이에 대해 부품업체 관계자들은 『세트업체의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나 6개월에서 1년 정도 애써 개발한 제품을 보려는 성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
지난 98년 세계에서 두번째로 고전압 서지레지스터를 개발했던 H사의 J사장도 개발 초기 세트업체에 납품을 시도하던 때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J사장은 『지금은 일본 제품 대비 국내 시장점유율 70%를 차지하고 있지만 개발 초기에는 품질승인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개발 후 납품까지 근 1년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부품업체와 세트업체간의 납품 공방은 부품의 성능을 떠나 「상호불신」의 문제로 발전한다.
정보취약은 부품업체의 또다른 애로사항이다.
한 주문형반도체(ASIC)업체 K사장은 외국의 반도체 대기업에의 납품을 목표로 최근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모뎀에 장착하는 「SAR(Segmentation And Reassembly)」칩을 개발하고 자신만만하게 그 회사의 한국지사를 찾았으나 망연자실했다.
제품 테스트만 통과하면 채택하겠다던 업체 지사의 말만 믿고 완성된 칩을 갖고 가니 ADSL 모뎀 「소스코드」가 자신들의 제품과 맞지 않아 어렵겠다는 것이었다.
K사장은 『사전에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개발한 우리도 문제지만 가장 핵심적인 소스코드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그 회사가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K사장은 그동안 쏟아부은 시간과 비용을 「버린 셈」으로 치고 다시 제품 개발에 들어갈 예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품업체의 경우 세트업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극에 달한다.
휴즈 전문업체인 S사는 국내 최초로 트랜지스터형 휴즈를 개발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았으나 국내 세트업체의 외면으로 현재까지 생산능력의 50%만 가동하는 데도 이를 언급조차하기 꺼린다.
괜한 얘기로 세트업체의 「신경」만 건드려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다.
한국전자부품연구원(KETI)에 따르면 고주파(RF) 증폭기의 경우 원산지별로 분류된 부품공급 비중에서 국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1%에도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나 국산 부품공급의 실태를 대변하고 있다. 표참조
또 올해 국산 전자부품 구매액은 지난해에 비해 20% 가량 늘어난 12조4123억원이나 국산 전자부품 채용비중은 0.6% 증가에 그쳤다.
김상근 한국전자산업진흥회 부회장은 『부품업체의 판로개척을 위해 세트업체의 부품구매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하며, 국산화 개발 대상 부품 정보를 공개해 부품업체의 개발동기를 유발할 필요가 있다』면서 인터넷을 통한 전자부품정보 검색과 상거래시스템의 조기 구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부 또한 부품업체와 소비자를 동시에 보호하기 위해 신개발 부품을 정부가 인정하는 시험기관의 신뢰성 평가를 거치게 해 「신뢰성」을 보험으로 보장해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러한 제도에 앞서 부품업체와 세트업체간의 신뢰 회복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인구 기자 clark@etnews.co.kr 전자부품연구원 손도식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