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대안은 없나

근대화 이후 지난 수십년 동안 정부 정책이 산업성장에 끼친 여러가지 공과를 우리는 몸소 체험했다. 싫든 좋든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최근 불어닥치고 있는 디지털혁명은 새시대에 맞는 생존전략 수립을 위해 기업활동의 패러다임 변화는 물론 정부·민·관의 「역할 재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산업의 축이 e비즈니스와 전자상거래(EC)로, 경제부흥의 견인차가 벤처로 각각 옮아가면서 산업주체들의 제자리 찾기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동안 귀가 닳도록 들어온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특히 e비즈니스 등 신산업에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역할론=CALS·e마켓플레이스 등 기업간(B2B) EC 추진전략은 종전처럼 전통적인 특정 굴뚝업종에 적용돼 온 산업육성책과는 근본적인 성격이 다르다. 관련 산업과 정책현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뿐더러 그만큼 정부의 역할도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업종과 기업규모, 시장특성에 따라 정부와 민간 기업들의 명확한 역할구분이 보다 중요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숭실대 이남용 교수는 『정부 역할은 산업발전방향 제시와 기술표준화, 통신시설 확충 등 기반인프라 구축에만 국한돼야 한다』면서 『이윤추구가 목적인 민간기업들의 e마켓플레이스 구축에 정부가 가타부타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지방 공단 등의 열악한 통신환경 고도화와 표준 부품데이터베이스(DB)·전자카탈로그·전자문서(XML/EDI) 개발·보급 등에 주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업종 및 시장 특성에 따라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SAP코리아 김은 이사는 『건설·국방·정부조달 등 기본적으로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인 B2B 분야가 있고 그렇지 않은 업종이 있다』면서 『무작정 정책을 남발할 게 아니라 이제는 정부와 민간이 각각 무엇을 어떻게 할지 심도있는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물론 B2B EC 활성화를 위한 역할론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국내 시장독식에만 혈안이 돼 배타적인 행태를 보여온 대기업들이나, 구멍가게식 영업에 만족했던 중소기업들도 면죄부를 얻기 힘들다. 한국전자거래협회 김동훈 부회장은 『그동안 B2B EC 정책의 중재경험을 되돌아 볼 때 기업규모나 업종을 막론하고 말은 많았지만 실제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면서 『특히 대기업들의 경우 세계표준과 시장주도권을 놓고 경쟁과 협력에 인색하지 않은 유수 해외기업들과는 엄청난 수준차가 있다』고 꼬집었다.

◇정책역량 확보방안=정부기관 조직의 특성상 전문적인 정책역량을 양적·질적으로 확충할 수 있는 방안은 드물지만 현재의 여건으로도 충분히 활용가능한 대안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EC와 같은 전문분야의 경우 공무원 순환보직제를 좀더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이다. 이와 함께 전자거래진흥원 등 산하기관들이 제 역할을 찾을 수 있도록 보다 강력한 전문인력 등용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밖에 외부 전문가집단을 적극 활용하고 부처간 EC정책 협의기구인 전자거래정책협의회에 보다 힘을 싣는 방안도 현실적인 대안이다. 사이버소비자센타 강성진 소장은 『EC가 근본적으로 기존 산업·법규 등에 포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산업육성책을 특정 부처에서 전부 내오는 것은 무리』라면서 『분야별 민간 전문가집단의 의견을 상시 수렴하는 통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다 현실적으로=B2B EC육성책이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 정책도 이제는 현장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사안이 세제지원이다. 섬유산업연합회 최문창 팀장은 『전통적인 굴뚝업종이 B2B EC를 가장 꺼리는 지점은 세원노출』이라며 『업계를 자발적으로 유도하는 핵심 사안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중소기업들의 기본적인 정보화 지원도 빼놓을 수 없는 현실적 대책이다. 애플리케이션서비스제공(ASP) 전문업체인 넥서브 오병기 사장은 『자체 조사결과 대기업과 일부 중견기업을 제외하면 정보화 환경이 낙제점 수준』이라며 『정보격차 해소와 업계 공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EC정책은 중소기업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