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움많은 60, 70년대를 지낸 사람이라면 우체국에 대한 추억을 하나쯤 갖고 있다.
유치환이라는 시인이 쓴 우체국에서 「네게 편지를 쓰노라」라는 유명한 시가 있을 만큼 우체국에는 갖가지 사연과 추억이 숨쉬고 있다.
우체국을 떠올리면 군사우편·엽서·위문편지 등 낭만적인 추억이 한아름 밀려든다.
제비인지 비둘기인지 모를 새 한마리가 총알처럼 날아가는 우체국 로고가 새겨진 빨간색 「우체국 통장」.
씨암탉을 팔아 만든 돈, 한 달에 한 번씩 부모님을 졸라 타낸 종자돈이 6년간 차곡차곡 우체국 통장에 쌓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가져봤던 예금통장이기도 했다. 우체국 통장은 어린이들에게 근면성을 심어준 도구였고 저금이 「애국」이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려준 계기가 됐다.
정보교환이 미흡했던 그 시기에 우체국은 정보접속창구였다. 송금환제도를 통해 돈을 부칠 수 있었으며 집배원 아저씨를 통해 먼 곳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우체국 때문이었다.
서울에 있는 딸이나 아들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던 곳, 우체국은 바로 우리의 60, 70년대 문명세계로 향한 유일한 「윈도」였다.
우표수집붐이 일면서 새벽마다 기념우표를 사기 위해 줄지어 서던 곳도 우체국이었다.
◇우체국, 정보화 접속창구로 =그런 우체국이 변하고 있다. 우체국 변신 기본전략은 「전국을 그물로 엮어라」.
전국 3000여개에 이르는 우체국을 네트워크로 엮는 작업이 한창이다. 핵심은 우체국 금융분산시스템. 전국 각지에 깔려 있는 우체국을 첨단 네트워크로 묶어 예금·보험료·공과금을 온라인으로 수납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금융전산망으로 변신했다.
총 42대의 중대형 컴퓨터가 우체국 예금과 보험 업무를 분산처리하게 된다. 연말연시·월말 등 공과금 납부로 인해 접수창구가 혼잡해도 시간당 100만건 이상 거래물량을 처리할 수 있다. 단일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분산방식 금융전산시스템이
다.
우체국 네트워크는 TCP·IP 방식을 사용해 인터넷은 물론 정통부가 운영중인 우편전산망·전파관리전산망·사무자동화전산망과 동일한 전송로가 이용된다.
우체국 담당자는 서비스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참조하면서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창구에서 종합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정통부가 지난 97년 8월부터 2년 9개월간 총사업비 1060억원을 들여 현대정보기술 등 53개 업체가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해 구축됐다.
대규모 금융망에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개방분산형 전산시스템이 구축된 것은 처음 있는 일. 국내에서는 그간 광주은행과 전북은행만이 소규모 분산형 전산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우체국과 같은 대규모 금융기관이 개방분산형 전산시스템을 채택한 것은 획기적인 일로 꼽힌다.
정통부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개방분산형 전산시스템의 도입을 기피함에 따라 국책사업으로 이 프로젝트를 추진, 성공을 거뒀다.
◇우체국 예금·보험서비스 획기적으로 개선될 듯 =이 시스템 구축으로 우체국
예금 및 보험서비스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게 됐다.
월말, 명절 전후에 거래량 폭주로 불편을 겪었던 은행과의 온라인 송금서비스 지체현상이 완전 해결됐다. 인터넷 프로토콜과 윈도OS를 이용한 최신 금융·보험 서비스도 가능해졌다.
우체국의 이런 변신에 힘입어 다른 은행들도 개방형 분산시스템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현재는 산업은행이 개방형 시스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우체국의 변신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시스템 구축을 주도한 현대정보기술이 베트남 금융결제원, 파키스탄 중앙은행 종합정보시스템 구축사업을 연이어 수주하면서 국내 금융분산시스템 구축이 세계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이밖에 베트남의 일부 은행, UN의 우정금융 개발사업팀 등도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우체국이 세계 금융권의 첨단기술 시범사례로 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 중심의 「ePOST」, 우체국의 미래다.
<김상룡기자 sr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