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정부가 주도해 20여년간 투자해온 국내 통신장비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진앙지는 인터넷 분야다. 음성과 이동통신 등 양날개를 중심으로 국가 개발역량을 집중해오다가 인터넷 산업이 국가 기반산업으로 부상하면서 이제 우리나라도 통신자립국이라는 명성은 옛말이 됐다.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국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정보통신기술경영연구소가 지난 9월 작성한 「인터넷장비 경쟁력 제고방안」에 따르면 네트워크 장비시장에서 국산 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올해 13% 정도에 불과하다. 네트워크 장비는 기업통신망 및 통신사업자 인터넷망의 핵심장비인 점을 고려한다면 안방을 외산에 내주는 셈이다.
올해 1조4000억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케이블모뎀 등 초고속 가입자망 장비분야에서도 상반기 도입된 ADSL장비의 85%가 수입에 의존하는 등 이 분야 역시 무역역조가 심각한 수준이다.
모든 통신망의 기간장비로 활용되고 있는 광통신장비의 국산 장비 시장점유율은 그나마 나아 50% 정도 된다.
문제의 심각성은 초고속 가입자망 장비분야를 제외하고는 국산 장비 비중이 더욱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지난해에는 27% 수준까지 향상됐던 국산 네트워크 장비 비중은 올해 중대형 백본장비(기간망장비) 수요가 크게 늘면서 국내업체들의 비중이 전년대비 절반 수준으로 하락했다. 이는 국내업체들이 소용량·저가장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답보수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광통신분야도 고부가가치 제품인 기간망장비로 가면 국산 장비 비중이 더욱 낮아진다. 특히 향후 수요가 급증할 고밀도파장분할다중화장비(DWDM)는 거의 해외 제품에 의존하고 있으며 광섬유케이블을 제외한 전 분야에서 무역적자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됐다.
또 장비 수출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격은 대만산에, 성능은 미국 제품에 밀리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것이 주요 원인이다.
정보통신부의 한 관계자는 『아직까지 정보통신 장비분야는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해외 장비 수입현황도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며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도입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음성국설교환기(TDX) 국산화 성공신화는 음성교환기 기술발전 추이가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데다가 사실상 정부의 보호정책 때문에 가능했다』며 『인터넷 장비분야는 너무 늦게 눈을 돌린 데다가 정부의 보호정책도 기대하기 어려워 갈수록 해외 의존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반박했다.
인터넷 인프라장비의 해외 의존도 심화는 단순히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내 정보통신 분야 효자상품인 이동통신분야에도 파급될 전망이다. 차세대 이동통신인 IMT2000에서는 비동기전송모드(ATM), 라우터, 광전송장비 등 인터넷 인프라 장비기술이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핵심기술 부족은 시스템사업 약화를 초래하고 결국에는 정보통신기기 최대 효자 품목인 단말기사업까지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지적이다.
이제 국내 통신산업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시점이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선진국, CDMA 이동통신단말기 최대 수출국이라는 화려한 외형에 덮혀 국가통신산업 대계는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