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부품.소재산업 르네상스를 위하여>17회-해외편(4);유럽편

텔아비브에서 북쪽으로 바닷가를 왼쪽으로 끼고 1시간여 달렸을까. 황량한 땅은 사라지고 하이파 항구가 나온다.

고층은 아니나 세련된 건물들이 큰 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간판을 보니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모토로라 등 낯익은 이름들이다

아미 로웬스타인 다이모테크 수석매니저는 『인근 테크니온대학의 우수한 인재를 활용하기 위해 해외 유명 정보기술(IT)업체들이 이 곳에 둥지를 트려 한다』고 말했다.

영화의 도시 프랑스 니스시와 맞붙은 앙티폴리스시의 소피아과학단지. 이 곳에도 AT&T, 알카텔, IBM 등 다국적 IT업체들의 연구개발(R&D)센터가 대거 입주해 있다.

현지에 연구소를 둔 오스트리아 칩설계업체 뉴로직사의 지아마리아 마츠첼리 경영지원부장은 『본사 직원들이 휴양지이기도 한 이 곳에서 근무하기를 원한다』면서 『이 곳만큼 인재를 확보하기 좋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장담했다.

제품 생산보다는 기술에 승부를 거는 유럽과 미국 업체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사람이다.

성공한 유럽의 첨단 산업단지들은 탄생배경과 운영방식은 달라도 한결같이 좋은 인재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스라엘 하이파나 프랑스 앙티폴리스는 후한 보수와 쾌적한 자연환경으로 인재를 유혹, 유럽내에서 내로라하는 첨단 산업단지로 떠올랐다. 어떻게 운영해 고급두뇌를 끌어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을 계속 머물게 하는지 이스라엘과 프랑스, 웨일스 3국의 산업단지를 돌아봤다.

◆이스라엚◆

이스라엘의 하이파테크니온(Haifa Technion)단지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테크니온대학은 하이파 항구로 가는 길 오른쪽 산기슭에 있다. 이 일대가 바로 하이파테크니온단지다.

항공, 소재, 전자, 생명공학 등에 걸쳐 40여개의 연구센터가 입주해 있다. 연구센터를 거친 대학교수나 연구원, 학생들은 창업을 하거나 창업 준비에 한창이다.

칩 설계회사인 조란(Zoran)은 이 곳에서 창업해 나스닥에도 상장한 성공 벤처기업이다. 본사는 미국 샌타클래라에 위치해 있는데 시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디지털신호처리기(DSP)와 AV칩을 거쳐 디지털다기능디스크(DVD),디지털카메라용 칩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아이작 쉔버그 조란 수석부사장은 『한때 글로벌 기업으로 크기 위해 R&D센터를 미국으로 옮길 생각도 했으나 실리콘밸리만큼 인재를 확보하기 좋아 이 곳에 머물기로 했다』면서 하이파테크니온단지의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창업 예비군이 밀집된 이 곳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업은 다이모테크사다. 이 회사는 테크니온대학이 전액 출자해 설립한 테크니온R&D파운데이션(TRDF)이 벤처 인큐베이터의 기능을 전담하기 위해 세운 유한회사다.

주업은 창업자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심사해 정책 당국인 산업통상부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는 일이다.

놀라운 것은 성공률이 50%를 넘는다는 점. 다이모테크가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관여하는데다 심사관인 산업통상부의 수석과학관실에서 과학자, 사업가, 수석과학관 등의 전문가들이 면밀히 검토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원 이전에는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사업계획과 기술을 검토하나 지원을 결정하면 경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벤처창업자, 다이모테크, 투자자가 공동으로 전문경영인을 외부에서 영입해 놓았기 때문이다.

지원규모도 매년 17만달러씩 2년간 34만달러로 정해져 있다.

정부는 성공했을 때에만 경영지분에 따라 로열티 형식으로 상환받아 재투자하며 실패했을 때엔 고스란히 손실로 떠안는다.

아미 로웬스타인 다이모테크 수석매니저는 『다른 나라와 달리 특정 기술에 대해 집중적으로 지원, 기술력을 높인 후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 게 우리 첨단산업 지원제도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곽동운 KOTRA 텔아비브 무역관장은 『이스라엘 정부의 관계자들은 놀랄 만큼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고 일단 좋은 기술이라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지원하는 게 이 나라 첨단기술 산업이 발전한 원동력』이라고 진단했다.

◆프랑스◆

4프랑스의 소피아과학단지 =프랑스 앙티폴리스에 조성된 소피아과학단지는 휴양지와 산업단지는 별개라는 인식을 일거에 깨뜨리는 곳이다.

이 단지에 입주한 기업은 무려 400여개에 이른다. 1만명에 육박하는 종사자들의 70%가 네트워크,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일한다.

다른 나라 단지와 비교해 두드러진 특징은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지원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단지를 둘러싼 5개 마을(앞으로 4개 추가 예정)의 대표와 인근 니스상공회의소가 단지 전체를 운영하고 있다.

첨단산업을 유지함으로써 고용창출과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입주기업에 대한 지원도 파격적이다. 땅을 무상 임대하며 고용창출시 1인당 3만∼7만프랑씩 지원한다. 단 3년 안에 30명 이상 고용을 창출해야만 혜택이 지속된다.

이 과학단지에 대한 현지정부의 기대감은 비즈니스를 위해서 공항의 이착률 스케

줄을 협의할 정도로 높다.

또 인근에 니스공대와 국립 전문대가 밀집해 현지인력을 확보하기 용이한데다 다른 나라 연구원들이 휴양지인 이 곳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 만큼 입주업체들의 만족도도 매우 높다.

지난 97년 이 곳에 유럽연구센터를 세운 반도체칩 설계툴 회사인 케이던스의 자크 올리비에 피에노아 부사장은 『교통, 인재, 언어 등 모든 요소가 다 갖춰져 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피에노아 부사장은 『한꺼번에 단지를 조성한 게 아니라 기업을 하나씩 유치해가며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오랜 과정을 거쳐 이뤄진 게 소피아과학단지의 성공비결』이라고 말했다.

◆웨일스◆

웨일스산업단지 =쾌적한 자연환경 자체만으로도 인재를 끌어모은 두 곳에 비해 웨일스 카디프지역은 원래 광업을 주산업으로 한 도시로 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하기 힘든 지역이다.

주정부 산하기관인 웨일스개발청(WDA)은 광업이 쇠퇴하면서 식은 지역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국내외 하이테크 기술 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웨일스의 대표적인 하이테크단지로 바꿔놓았다.

우리에게는 LG전자와 구 LG반도체의 복합단지 조성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곳 정부 역시 첨단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공장 부지나 건물 등을 거의 헐값으로 임대해주며 가족들의 정착을 위해 집, 학교, 운전면허 취득 등까지 알선해준다.

지원은 회사 설립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회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WDA 소속 매니저를 선정해 회사를 수시로 방문하면서 애로사항을 청취한다. 또 기업의 요청시 대기업과의 거래를 알선해주기도 하며 웨일스대학, 카디프대학 등과 산학 연계도 돕고 있다.

제인 이간 WDA 부사장은 『투자 유치가 어느정도 이뤄진 90년대 하반기부터 기존 업체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가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최근에는 기업의 추가 재정지원 확대 및 e비즈니스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중』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값싼 공장 비용 등으로 왔던 기업들도 이젠 이 곳을 축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 애쓰는 단계에 도달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업체인 미국 MBE가 웨일스 카디프에 설립한 IQE사의 마크 펄롱 지사책임자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공장부지 등의 원가 경쟁력에서 한 걸음 나아가 고부가가치 기술을 개발해 연구 중심지로 거듭나려 한다』고 말했다.

◇몇가지 시사점 =유럽의 성공한 첨단산업단지들은 기존 산업단지를 첨단산업단지로 탈바꿈시키려는 국내 정책당국에 좋은 모델이 될 듯하다.

먼저 기술 및 경영의 분리와 지속적인 사후관리다.

이스라엘의 경우 전문가가 기술을 정확히 평가하고 개발자는 기술을 개발만 할 뿐 경영은 또다른 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또 사업의 성공률을 높여 자금 회수율을 높이고 이를 재투자함으로써 지속적인 지원이 가능하다.

두번째는 자금투입의 공정성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심사 결정권을 가진 과학기술 심사관을 정부 관료가 아닌 민간 전문가에게 맡겼으며 그 과정을 투명하고 철저하게 함으로써 성공률을 높이고 있다.

또 소피아과학단지나 하이파테크니온단지 모두 고급두뇌의 유치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도 주목거리다.

디지털시대의 경쟁 우위는 기술력이고 기술력은 곧 우수한 인재에서 나온다는 점을 앞선 첨단 산업단지는 일찍부터 눈떠 있다.

단지 기업만 입주시킨다는 생각에서 탈피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웨일스개발청은 입주기업의 가족들에게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입주기업의 근무자들을 머물게 하는 데 성공했으며 소피아과학단지와 하이파테크니온단지는 휴양지의 이점을 극대화해 인력 유출을 막고 있다. 뉴로직사의 한 관계자는 『소피아과학단지에서는 회사가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일은 있어도 사람이 이 곳을 떠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들이 자생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번에 방문한 기업들의 관계자들은 『성공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지 정부의 지원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다만 씨를 뿌리는 일만 하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은 기업의 몫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도 세 곳의 정부는 기업들이 사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 데 충실하고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박경철 전자부품연구원 대외협력팀장 Parkkc@nuri.ket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