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업계가 「정현준게이트」를 계기로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정현준사태를 단지 「한 사이비 벤처금융인의 사기사건」으로 치부한다 해도 이 사건으로 벤처에 대한 신뢰는 땅끝까지 떨어졌다. 지난 2년 동안 벤처에 집중됐던 관심이 벤처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벤처는 이제 회복불능의 사태에 빠질 것이란 무책임한 얘기까지 들린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벤처는 다가오는 신경제의 주역이고 21세기 한국경제의 희망이다. 문제는 지금의 벤처문화나 인프라를 가지고는 한국경제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다시 시작한다는 자세로 새틀을 만들어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벤처의 구조적 문제점과 대안, 향후 비전을 시리즈로 긴급 점검해 본다. 편집자◆
정현준게이트는 닷컴에서 시작된 벤처거품론으로 추락한 벤처에 대한 신뢰를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이같은 사건이 언제 어디서 재발할지 모를 정도로 우리 사회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만연해 있으며 우리 벤처업계가 이미 곪을 대로 곪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현상의 근본원인은 이른바 「대박」 지상주의 탓이라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벤처의 위신이 곤두박질을 쳤지만 「벤처=대박」이란 한탕주의가 여전하다.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고 코스닥시장이 피크때에 비해 3분의 1 이상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벤처기업인들은 「대박」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금융경색이 심화되고 벤처의 신뢰가 실추되면서 투자유치의 거품이 사라졌다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벤처인의 욕심은 끝이 없다.
벤처기업과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벤처캐피털도 마찬가지다. 자금시장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벤처기업을 소 닭 보듯 하지만 머릿속에는 수십∼수백배의 대박을 그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주의에 젖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투자유치를 요구하는 기업을 외면한다. 심지어 투자를 한 기업까지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태가 잇따르고 있다. 경쟁적으로 벤처투자에 참여했던 은행·증권·종금·투신·보험 등 기관투자가들도 잠시 「대박」의 꿈을 접은 채 벤처를 떠나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시장이 한창 좋을 때 「천사」를 자처하며 벤처기업을 물색하다가 어느샌가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린 엔젤들도 「대박」의 꿈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벤처라면 아이템이 뭔지도 고려하지 않은 채 묻지마 투자를 일삼던 개인들은 이제 벤처라면 손사래를 치는 형국이 돼버렸지만 시장이 호전되면 엔젤이란 이름으로 다시 벤처 전면에 등장할 것이 확실하다.
지금의 벤처위기 근본원인은 바로 이 「벤처=대박」이라는 그릇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벤처기업가나 투자가는 물론이고 벤처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많은 사람들이 대박을 추구하다 보니 편법과 불법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우리 사회의 행태가 어느 정도까지 심각한 상황인지는 이미 정현준사태로 증명이 됐다.
이젠 벤처가 과연 대박으로 직결되는지 냉정하게 되짚어봐야 하는 시점이 됐다. 벤처란 글자 그대로 성공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훨씬 높은 모험 비즈니스다.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실리콘밸리에서도 10개 중 9개는 실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게 바로 벤처 비즈니스다. 물론 그만큼 확률이 낮다 보니 성공하면 대박이 가능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의 벤처시장이나 벤처문화는 10개 중 9개의 대박을 추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벤처업계에선 이번 기회에 건전한 벤처문화를 조성하고 벤처가 우리 경제의 주력으로 확실하게 뿌리내리기 위해 무엇보다도 대박문화를 청산하는 일부터 시작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벤처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우리의 희망은 그대로 벤처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