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대계 다시짜자> 4. ETRI 위상 재정립을

지난 5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그동안 진행해 온 중점 연구 사업의 기술가치를 발표했다. 외부 연구기관을 통해 파급효과를 화폐로 환산한 기술가치는 CDMA·디지털TV·ATM교환기·광전송시스템 등 4개 분야가 최저 430조원에서 최고 66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됐다.

충분히 자랑스러울 만한 이 결과에 대한 업계의 시각은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일정부분은 수긍할 만 하지만 너무 부풀려졌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이견의 밑바탕에는 『개발도 중요하지만 시장에서 경쟁력을 지닐 수 있는 제품개발이 더욱 중요하다』는 업계의 입장이 반영돼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사실 ATM교환기·광전송시스템 등은 국내용에 한정될 뿐 세계시장에서는 아직도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데다가 국내에서조차 점차 해외 제품에 밀리는 형국』이라며 『한국전자통신연구원만의 시각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ETRI와 공동프로젝트를 진행했던 한 엔지니어는 『대부분의 프로젝트 진행은 기업체에서 맡아서 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전체 프로젝트 진행상황만 관여했다』며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어긋나서 당황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최근 평가에도 불구하고 ETRI가 우리나라 통신기술을 이끌어왔다는 데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대기업들이 통신장비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을 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고급 기술자를 유치, 음성국설교환기(TDX) 국산화, 코드분할다중방식(CDMA) 이동통신 시스템 및 단말기 개발 등 굵직굵직한 국내 통신 장비 산업의 역사에는 ETRI가 중심에 서 있었다.

이러한 실적은 현재까지도 ETRI가 정부의 정책개발 및 기술과제 등 대다수 국가 개발사업에서 공동 사업자로 선정되는 밑받침이 됐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역할에 대해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우선 그동안 국내 종합통신장비 회사나 벤처기업들의 기술수준이 상당히 높아져 있는 것을 감안, 당장 상용화해야 할 단기 프로젝트는 업계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올 상반기 ETRI로부터 공동으로 한 정책과제를 해보자고 제의받은 한 업체의 임원은 숙고 끝에 그 프로젝트에서 빠지기로 했다. 그 과제 자체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지만 ETRI에 대한 불신도 한몫을 했다. 그 임원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공동개발사업을 진행하면 개발기간이 너무 길고 업체와 달리 상용화 측면보다는 기술 자체 습득에 만족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또 IMF 이후 고급 엔지니어들이 많이 빠져나가 싱크탱크로서의 역할도 이제는 미지수』라고 속내를 내비쳤다.

ETRI에 근무했다가 최근 전직한 한 관계자는 『최근 몇년간 단기프로젝트의 경우 연구원에서 주도하기보다는 업체에서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제 정부는 상황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을 국가연구소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3년 이내에 상용화해야 할 단기 프로젝트는 업계 중심으로 진행하되 5년 이후를 내다보는 장기 프로젝트는 ETRI에 맡기는 방안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당장 돈이 되지 않지만 국가 미래를 위해 오랜기간 투자해야 할 표준화 활동 및 원천기술 획득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도 만들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해외 선진국에 비해 인력이나 예산이 크게 미약한 국내 상황을 감안하면 미래 및 현재를 위한 투자 효율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