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업계 구조조정 태풍

거세게 몰아닥치는 구조조정의 바람은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를 격랑으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해외 합작 또는 매각은 지금까지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움직임으로 해당 업체는 물론 협력업체의 경영 환경에도 일대 변화를 몰고와 산업 전반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배경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들이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것은 이대로 가다가는 미래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해외 자본의 유치에 냉담했던 삼성전자가 TFT LCD를 중심으로 외자 유치에 적극 나선 것은 이러한 위기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삼성전자는 가격 하락으로 내년도 TFT LCD 경영 환경이 최악의 상황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혼자 힘으로 추진하려던 5세대 라인 투자에 해외 협력처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LG전자가 필립스와 디스플레이 부문에서 합작하는 것도 브라운관사업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PDP·유기EL 등으로 사업구조를 전환해 나가기 위한 것이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투자가 이뤄져야 지속적으로 사업을 꾸려나가는 대표적인 장치산업인데 자금줄이 막힌 것이다. 삼성전자와 같이 막대한 수익을 거두는 업체도 투자 부담을 느낄 정도다.

현대전자 역시 마찬가지다. 지배구조 변동으로 독자적인 살길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 됐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매출확대 위주의 사업으로 규모에 비해 비대한 사업 및 인력 구조를 채 개선하지 못해 8조원 이상의 부채에 쩔쩔매고 있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올들어 수익이 급증하고 있어 독자경영은 오히려 기회다. 하지만 신규 투자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다. 외자 유치가 절실하나 투자를 받기에는 아직 매력적이지 못한 게 현실』이라고 말해 외자 유치에 앞서 대대적인 구조조정 가능성을 내비쳤다.

◇현황 =구조조정은 우선 사업구조 재조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TFT LCD사업이 반도체부문 전체에 부담을 줄 것으로 보고 독자적인 사업 부문으로 분리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삼성코닝정밀유리에 대한 지분 확대, 삼성SDI의 컬러필터사업 인수로 핵심 부품의 자급체제를 공고히 한 것도 TFT LCD사업부문을 분리하기 위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측은 『사업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것일뿐 사업부문 분리 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LG전자가 디지털TV 등 세트사업에 집중하는 대신 디스플레이부문을 필립스와 합작해 분리하기로 한 것도 PDP 등 신규 투자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 회사는 이미 웨일스 브라운관 공장을 필립스에 완전 매각키로 했으며 다른 해외 공장도 필립스와의 합작법인 출범에 맞춰 라인을 재조정할 방침이다.

현대전자는 지배구조 변동이 마무리되는대로 기존 사업구조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 회사는 지난달까지 8억달러를 조성한 유가증권의 매각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한편 맥스터 등 해외 우량 자회사와 웨일스 공장 등 유휴 자산을 조기에 매각해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올 초 한 때 추진하다가 중단한 구미 공장의 매각도 다시 수면 위로 오를 가능성도 있다.

최근 일부 D램 생산라인의 파운드리 라인 전환으로 시작된 D램 생산구조 개편도 앞으로 가속화할 전망이다. 다만 통신·LCD사업부문의 매각은 매각처가 뚜렷하지 않아 지배구조 변동 후로 미뤄질 가능성이 있다.

오리온전기는 해외 모니터 및 TV업체와의 매각 협상이 지지부진함에 따라 인력축소 등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해야 하나 지난 4월 노조의 강력한 반발로 가동 중단을 경험도 있어 그 시점은 다소 유동적이다.

◇전망 =이들 업체가 아직 구조조정의 전 단계에 있으나 외자 유치나 해외 매각이 임박하면 구조조정은 급류를 탈 전망이다. 그 시점은 내년 초가 유력하다.

구조조정 강도는 반도체보다는 디스플레이부문에서 강력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의 추진 방향만 봐도 브라운관분야는 순수 국내 업체로는 삼성SDI만 남게 될 전망이다. TFT LCD분야도 LG필립스에 이어 삼성전자와 현대전자도 합작사로 탈바꿈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해당 업체보다는 협력 부품업체들에 큰 파장을 몰고올 것으로 예상된다. 협력 부품업체들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모기업의 보호를 받아왔으나 이제 그 보호막이 사라지게 된다.

글로벌한 경쟁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그룹 관계사 역시 마찬가지다.

해외에 동반 진출할 정도로 밀접했던 대기업과 협력 부품업체의 관계는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게 됐다.

부품 협력업체들이 모기업의 구조조정 방향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기 때문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