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중순 국내 가전유통업계에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의미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우그룹이 워크아웃 대상으로 결정된 당시, 부실채권 등을 우려한 국내 가전업체들은 하이마트에 대한 제품 공급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국내의 한 주요 가전사는 거래 유지조건으로 300억원의 담보를 설정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하이마트측은 크게 반발했고 결국 여러 가지 특수관계로 인해 가전업체들이 한발 물러나는 선에서 상황은 마무리됐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시장 관계자들은 주요 가전업체들이 한풀 꺾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를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 이후 밀려들기 시작한 일본 가전업체들의 움직임에서 찾는다.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 직후 국내 유통시장은 대형유통점들이 일본 가전제품을 본격 취급하기에는 다소 부담이 되는 분위기였다. 특히 국내 최대 가전유통업체인 하이마트로서는 더욱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하이마트는 살아남기 위해 제품의 국적을 가릴 입장이 아니었고 이후 하이마트 매장에는 일본 주요 제품들이 하나 둘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후 전자랜드21은 물론 중소형 양판점까지 일본 제품의 취급을 늘려 나가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국내 가전업체 대리점까지 일부 품목이지만 일본 제품을 매장 한쪽에 전시 판매하는 것에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됐다.
이같은 상황은 국내 가전유통시장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취급품목의 확대는 가전유통점들에 많은 기회를 제공했고 더 이상 생산업체들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바빠진 쪽은 생산업체들이었다. 자사 대리점보다 양판점, 할인점 등을 통한 판매가 늘어나는 현상을 지켜보던 삼성전자, LG전자 등 주요 가전업체들은 과거의 대리점 우선정책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양판점 등의 채널은 자신들이 마음대로 제어하기 힘든 판매채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형 유통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유통점 머천다이저(MD)를 찾아가는 빈도가 높아졌다.
실제 하이마트와 전자랜드21로 대표되는 대형 양판점들은 수입가전제품 확대의 가장 큰 수혜자다. 이미 판매물량의 20% 정도를 수입제품으로 대체하고 있는 이들 유통점은 이제 주요 가전업체들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다. 생산업체와의 공급가격과 결제조건 협상은 특수한 일부 제품을 제외하고는 우위에 서서 결정한다.
대형 할인점과의 변화도 매우 주목된다. 지난해까지 가전제품 취급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온 할인점들은 올해 들어 전체 매장에서 가전제품 전시비율을 20%까지 끌어올리면서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일부 신규 오픈점에는 첨단 제품 중심의 가전 전시장을 만들어 구형모델을 싼 가격에 판매한다는 기존 통념을 불식시키면서 고객잡기에 나서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할인점에서 가전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이 늘고 있는 것이 배경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수입선다변화 폐지 이후 취급할 만한 제품군이 많아졌다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주요 백화점 등에서는 국내가전매장을 빼고 수입가전매장을 입점시키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이같은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높은 마진율 때문이지만 이 또한 제품군 확대로 수입가전만으로 운영이 가능해졌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더 재미있는 변화는 가전업체 직속 대리점과 수입가전 전문점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들 업체간 구분이 사라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가전대리점들이 소니 캠코더, 수입 가전전문점들은 MP3 등 국내 업체 제품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들 업체의 변화는 한층 가속화돼 동네 대리점들의 일부는 없어지고 일부는 대형화되면서 국내, 외국 제품 모두를 취급하는 형태로 전환되고, 살아남는 대리점들은 마케팅력을 바탕으로 유통시장에서 힘을 행사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심규호기자 khs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