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관계관리(CRM) 시장에 참여한 업체들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사업 아이템에 CRM 관련 문구가 들어가지 않으면 낙오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너도나도 CRM에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참여한 기업들도 각양각색이다. PwC·앤더슨컨설팅·딜로이트컨설팅 등 대형 컨설팅사는 물론 DMS나 D&I컨설팅 등 CRM 전문 컨설팅을 표방한 기업도 있다. SI업체나 하드웨어 업체들도 CRM전담팀을 구성해 프로젝트 수주에 나서고 있다.
CRM 전문기업도 태어나고 있다. 한국NCR나 SAS코리아, 위세아이텍 등 기존에 데이터웨어하우징(DW) 전문으로 알려진 회사들이 CRM 전문기업으로 변신하고 있는가 하면 콜센터 업체나 DB마케팅 전문업체, 퍼스널라이제이션 솔루션을 제공하던 회사들도 CRM업체로 전환하고 있는 양상이다.
시벨코리아나 브로드비전코리아 등 해외 굴지의 CRM 전문기업이 국내에 둥지를 틀었고 이피파니나 오닉스 등도 조만간 상륙할 것으로 알려져 국내 CRM 시장은 말 그대로 「춘추전국 시대」을 맞고 있다. CRM에 참여한 업체들이 이처럼 많은만큼 그들이 주장하는 것도 상이하다. 한국NCR를 위시한 DW 진영에서는 고객데이터를 통합DB로 구축한 다음 데이터마이닝으로 추출된 고객에 대해 타깃별 캠페인 관리나 마케팅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명 「분석 CRM」으로 대변되는 DW 진영은 전사적인 DW를 구축하고 앞단의 고객접점과 관련한 솔루션을
도입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반면 시벨코리아와 한국오라클, SAP코리아는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콜센터나 e메일, 영업점 등 고객접점 데이터를 통합한 다음 DW로 데이터를 넘겨주는 「운영 CRM」이 그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부 기업들은 캠페인관리나 개인화, 영업점 관리 솔루션 등이 우선적으로 도입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업체마다 상이한 CRM 접근법을 강조함에 따라 수요기업만 혼란을 겪고 있다.
『CRM을 도입하려고 업체에 문의해봤는데 저마다 그 방법론이 모두 다르더라』며 『이렇게 복잡한 줄 몰랐다』는 한 관계자의 말은 비단 한 기업만의 고충이 아니다. 이는 CRM 개념 자체가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CRM업체들이 고객관리에 대한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자사 솔루션의 강점만 나열하면서 국내 CRM 시장을 혼탁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특히 CRM업체들의 경우 「청산주의식」 접근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아 더욱 문제시되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어떤 형태로건 고객관리를 하고 있는 터에 「과거의 것은 모두 버리고 우리만 따라오라」고 강요하는 것은 자칫 중복투자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많은 증권사들이 20억∼30억원씩 투자하며 DW를 도입했지만 활용률은 높지 않은 실정이다. CRM 공급업체들의 주장대로 DW를 구축했으나 고객관리에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가 없고 이론에만 치우치면서 현실과의 괴리감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CRM 벤더들은 시장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고객데이터를 가지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해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CRM을 구축하더라도 정작 활용방안을 몰라 천덕꾸러기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며 『벤더들에서 솔루션 판매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기업환경에 적합한 CRM 모델을 수립하고 효율적인 활용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한 관계자의 말은 최근의 국내 CRM의 문제를 대변하고 있다.
<정은아기자 ea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