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업체인 T사는 최근 가까스로 부도위기를 넘겼다. 올 하반기로 예상되던 발신자번호확인서비스가 지연됨에 따라 하반기 매출목표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상반기까지는 1차로 유치한 자금과 해외매출로 돌파구를 열었으나 서비스 지연에 따른 수요미달로 급격한 자금압박을 받았다. T사는 관련 통신 서비스가 연내에 실시된다는 추측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2차 투자유치를 준비중이나 투자자들을 어떻게 끌어들여야 할지 고민이다.
AISC업체 가운데 일부 신생 벤처업체들은 최근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한때 외부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는 등 의욕이 넘쳤으나 투자를 약속했던 개인투자자들이 발을 빼면서 운전자금 부족으로 업무가 마비된 상태다. 직원들마저 줄줄이 빠져나가 개발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벤처투자 열풍이 지나간 자리는 싸늘하다. 자본경색과 벤처위기설 등으로 벤처기업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벤처기업은 기댈 곳을 잃었다.
정부자금이나 민간자금 모두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개발과제 자금은 기회와 지원금액에 있어 절대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말 그대로 기술개발 단계에 이르기도 벅찬 수준이다.
또 올해 초만 해도 경쟁적인 투자에 아우성을 치던 벤처캐피털·개인투자자들도 이제는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이들도 수익성 관리 앞에는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벤처캐피털이 원하는 할증(프리미엄) 규모와 벤처기업이 바라는 프리미엄 규모가 큰 격차를 보여 있는 자금도 놓치는 판이다.
이같은 국내 벤처투자 환경의 악화는 이미 해외에서도 그 조짐을 보였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뉴욕 무역관이 미국벤처캐피털협회(NVCA)가 최근 발표한 벤처캐피털산업동향을 분석한 결과 올 3·4분기 미국 벤처투자는 1774개 업체에 259억달러로 지난 2·4분기에 비해 투자업체수가 56개, 투자액은 18억달러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벤처투자는 지난해 4·4분기 250억달러를 넘어선 후 올 1·4분기 263억달러, 2·4분기 277억달러를 나타내 분기당 10억달러 내외의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해왔으나 3·4분기부터 사정이 나빠졌다. 업체당 투자금액도 지난해 4·4분기 이후 1500만달러선을 지속해왔으나 이번에 1400만달러대로 떨어졌다.
기술개발과 제품 상용화라는 거리에서 벤처기업들은 자금확보 문제로 고민한다.
우선 정책자금이 주로 성장기업에 집중돼 창업초기 기업이 상대적인 빈곤에 처한다는 것이다.
창업초기 벤처가 당장 정책자금이 요구하는 수준의 지원요건을 갖추기란 어려운 일이다. 기술신용보증기금 등에서 요구하는 각종 세부서류는 이들로 하여금 높은 벽을 느끼게 한다.
금융기관에서 부실채권을 담보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면서도 중소 벤처기업의 우량 매출 채권을 담보로 해서는 채권을 발행하지 않는 것도 걸림돌이다. 대기업과 벤처기업간 또는 시스템업체와 부품소재업체간에 대부분 매출 채권으로 이뤄지는 상거래 관행상 이에 대한 해결이 시급하다는 것이 업계의 일치된 의견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주변 여건에 따라 업종전환이나 사업확장을 하려는 벤처기업의 경우 이에 대한 근본적인 지원대책이 없는 것도 어려움 중의 하나다. 대부분 한두가지 품목에 전력투구하는 벤처기업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사업 전환과 확장이 회사의 존폐와 직결된다.
자금조성도 중요하지만 이에 대한 시기적절한 배분도 문제다.
1조원 이상의 벤처투자자금, 1000억원 이상의 벤처M&A자금 등이 조성돼 있으나 이에 대한 실질적인 활용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벤처업계 종사자들의 볼멘소리다.
코스닥 시장의 규제철폐도 벤처업계가 주장하는 목소리다.
현재 일반 기관투자자들과는 달리 창업투자회사의 투자지분만은 코스닥 등록 이후 3개월간의 지분 매각제한 규정을 둠으로써 창투사의 발길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벤처업계는 창투사도 일반 투자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최근 정부는 상황수습에 나섰다.
산업자원부는 지난 16일 무역클럽에서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 취임 후 첫 번째로 벤처업계와의 간담회를 갖고 벤처기업 활성화를 위한 종합대책을 추진할 계획을 밝혔다.
산자부는 정보기술혁명 등 급변하는 대내외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한 벤처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내실있는 기술평가를 통한 벤처기업 확인제도 △벤처기업 중심의 코스닥 시장 활성화 △벤처기업간 전략적 제휴 촉진을 위한 관련 규제개혁 △투자자금 공급확대를 위한 창업투자회사 및 엔젤투자 활성화 등을 제시했다.
산자부는 그러나 과거와 같은 직접적인 자금지원보다 자력갱생의 원칙아래 건실한 벤처환경 조성에 중점을 둔다는 방침이다.
산자부는 특히 부품소재 분야 벤처기업 육성 시스템을 본격 가동하기 위해 올 7월부터 부품소재 분야 제1차 기술개발사업에 들어갔다.
산자부는 1차로 17개 기업을 부품소재 기술개발 사업자로 선정하고 올해 145억원을 포함해 향후 3년간 총 379억원의 기술개발 자금지원 계획을 확정했다.
산자부는 8개 공공 연구기관들로 통합연구단을 구성해 개발 대상사업에 대한 기술성을 평가하도록 하고 기술성 평가 외에 38개 투자기관들로 구성된 부품소재투자기관협의회로 하여금 사업성과 기업투명성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기술개발사업
에 대한 투자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한국벤처캐피털협회(회장 김영준)내 부품소재투자기관협의회는 한국산업기술평가원으로부터 부품소재 분야 벤처기업을 추천받아 기업설명회(IR)를 개최하고 투자기관 3개 이상이 투자의향을 밝힌 기업을 선정, 투자소위원회를 구성해 투자심사 및 협상을 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중이다.
부품소재투자기관협의회는 이달 초까지 제2차로 총 51개 업체에서 45개 업체를 선정, 최근 투자심사 및 협상에 돌입했다. 이번 기술개발사업 선정은 정부가 아니라 전문 연구기관들과 투자기관들에 의한 시장친화적 방식이 처음으로 도입·적용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벤처기업 자금난을 덜어줄 제도개선과 환경조성이 중요한 때다.
<김인구기자 cl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