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12회-전뇌(電腦)대국의 기치

지난 23일 북미 반도체 현물시장은 한마디로 「야단법석」이었다. 연일 하락세였던 64MD램의 가격이 폭등세로 돌아선 것이다. PC133제품은 전날보다 무려 46%나 뛰었다.

D램 가격이 이처럼 하룻밤 사이에 폭등한 적은 근래에 없었다. 반도체 업계 사람들은 물론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도 당혹스러웠다. 이모저모 따져봐도 뾰족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PC시장이 갑자기 호전된 것도 아니고 이유가 없었다.

전문가들은 다음날에야 비로소 실마리를 찾았다. 중국이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임박했다. 중국의 PC시장도 개방될 것이며 덩달아 D램 시장도 커질 게 뻔했다. D램 현물시장의 큰손들은 이러한 기대감으로 사재기에 들어갔다.

중국, 세계 PC업체들이 가장 관심을 쏟는 시장이다. 가구당 한대씩만 팔아도 3억대가 넘는다. 중국에서는 외아들(獨子)이 많아 가구수도 많다.

중국PC시장은 매년 20% 이상 고속성장하는데 지난해에는 1200만대가 보급됐다. 아직 낮은 보급률을 감안하면 앞으로 초고속 성장이 예고됐다. 조만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시장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중국 PC시장을 만만히 봤다가는 큰 코 다친다. 외산 PC에 중국의 무역 장벽은 「만리장성」만큼이나 높다.

외산 PC에 대한 관세를 내린다고 내린 게 17%다. 생산허가제도 여전히 외국 PC업체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무엇보다 판매망을 확보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세계 IT업체들은 틈날 때마다 중국의 WTO 가입을 촉구했다. 장성의 문을 빨리 열라는 외침이다.

지난해말 중국은 미국과 WTO 가입을 합의한 후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예전에 비해서는 크게 개방됐으나 아직은 「쪽문」이다. 무역 장벽을 넘어도 또 다른 관문이 나온다. 중국 업체와 소비자다.

무역 장벽은 천천히 낮아지겠으나 성안의 군사력은 엄청난 속도로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장수가 바로 롄샹(聯想)그룹이다. 우리에게는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 비서가 손수 찾아간 곳으로 더욱 알려진 회사다.

롄샹그룹은 데스크톱PC 시장 점유율 40%, 노트PC 시장 점유율 27%로 중국내 최대 PC업체다. IBM이나 컴팩, HP와 같은 공룡기업들도 이 회사만큼은 어찌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롄샹그룹의 창업자 류전즈(柳傳志) 총재에 대한 중국인의 애정은 거의 충성에 가깝다. 자국 PC시장을 지켜낸 「중국 정보기술(IT)의 자존심」으로 추앙받는다.

류전즈 총재는 90년대 초반 미국 PC업체의 무차별적인 공세로 수세에 몰렸다가 다시 점유율을 회복하는 대역전극을 펼쳤다.

왕지둥(王志東) 스퉁리(四通利) 회장이나 장자오양(張朝陽) 소우후(搜狐) 사장, 양위안칭(楊元慶) 부총재 등 류전즈 총재의 후광을 받은 롄샹 경영자들도 중국 젊은이의 우상들이다.

롄샹그룹뿐만이 아니다. 팡정(方正), 바오다(實達) 등이 2, 3위를 지키고 있으며 하이얼(海爾), 자이얼(戴爾) 등이 외국 PC업체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다.

국산 PC 점유율이 73%에 이른다.

중국의 PC업체들이 다른 업종과 다른 점은 젊은 경영진으로 포진돼 있다는 점이다.

창업자를 제외하곤 대부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다. 우리로 치면 80학번 안팎이다. 문화혁명을 겪고 대학시절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을 몸으로 체감한 세대들이다. 시장이 뭔지, 가격이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다.

중국 PC업체들이 단지 정부의 보호를 받아 컸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현지 업체보다 높은 장벽은 중국 소비자들이다. 오관을 돌파한 조자룡도 이 벽만큼은 넘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고가 마사이치(古賀正一) 도시바 부사장은 이를 잘 안다. 지난 초여름 그는 예정에도 없던 중국 출장을 가야 했다. 현지 네티즌들이 자사 노트PC에 대해 벌인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졌기 때문이다.

발단은 한 중국인 네티즌이 웹사이트에 올린 글. 이 네티즌은 도시바가 지난해말 미국에서 노트PC의 결함을 인정해 배상에 합의하고도 중국 소비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사과도 없는 것은 중국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난의 글을 올렸다.

중국내에서 도시바에 대한 반감은 현지언론에서 대서특필됐으며 급기야 불매운동으로 나타났다.

고가 마사이치 부사장의 생각은 단순했다. 「법적으로 중국 소비자에게 배상할 책임이 없다. 중국 소비자들은 미국 소비자와 다르다. 배상할 필요도 없이 고쳐주기만 해도 좋아할 것이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특급 소방수로 중국에 간 그는 오히려 기름만 붓고 왔다. 중국 소비자들은 배상하지 않는 것보다도 미국 소비자와 자신들을 달리 보는 도시바의 시각이 더욱 불만스러웠다. 반일감정까지 치밀면서 불만은 분노로 바뀌었다.

베이징의 지식인들은 현지 변호인단을 구성해 도시바를 상대로 소송까지 냈다.

어쨌든 이번 도시바 사건은 중국에서도 소비자의식이 고양됐다는 것, 네티즌 파워가 엄청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중국의 PC산업은 이처럼 강력하다. 아직 판로 확보가 덜 돼 있는 것도 한 원인이나 외국 업체들이 중국 PC시장에 발을 걸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롄샹그룹의 경우 외국 업체들의 쇄도하는 제휴의 손길을 마다하는 게 귀찮을 정도다.

중국의 PC산업은 값싼 노동력에 의한 저가를 무기로 이제 내수를 넘어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내수시장을 석권한 롄샹은 지난해초부터 동남아와 미국으로 저가 PC를 수출해 삼보컴퓨터 등 한국업체들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 PC 강국의 자리를 맡아놓았다.

그 힘은 대만에서 나온다.

대만은 데스크톱PC는 물론 주기판 등 PC용 핵심부품과 주변기기시장의 절대 강자다.

주기판의 경우 데스크톱용에서 70%, 노트북용에서 50%의 세계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다. 모니터와 스캐너 등의 점유율도 50%를 넘는다.

대만의 앞선 부품 및 주변기기 기술과 중국의 PC제조력이 결합한다면 이를 꺾을 장사가 없다.

대만 PC관련 업체들의 중국 투자도 활발하다. 지난 상반기 대만업체의 대중 투자는 8억달러에 육박해 지난해에 비해 2.6배나 증가했다. 심천이나 동관 등지에 가면 대만 업체들의 공장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만업체에 대한 중국 정부의 물밑 지원도 대단하다. 중국 정부는 대만의 에이서가 베이징에 세운 PC조립공장을 조금 더 입지가 좋은 과학단지로 이주하겠다고 하자 신속하게 승인했다.

중국에 CPU나 D램을 팔 수는 있어도 PC와 주변기기를 파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질지 모른다.

「껍데기일 뿐인 PC산업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으나 꼭 그렇지 않다. 뭐니뭐니해도 PC는 정보기술(IT)산업의 기초다.

중국은 이제 IT산업의 단맛을 보고 있다. 중국이 세계 PC시장에 당장 보여주는 역량보다는 이를 통해 확보할 IT 파워가 더 무섭다.

최근 상하이에서 발족한 「상하이그레이스반도체」는 중국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회사는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아들 장미옌헝(江錦恒)과 대만의 포모사플라스틱 그룹 왕융칭(王永慶) 회장의 아들 왕원양이 합작해 화제를 모았다. 이 회사는 급성장하는 중국내 PC산업을 발판으로 한국과 대만에 이어 반도체 신화를 이루려 한다.

중국이 이른바 전뇌(電腦)라는 컴퓨터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것은 미국과 같은 IT대국의 야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PC시장의 장악은 그 장정의 첫걸음이다. 한 걸음을 떼자마자 지구촌이 흔들거리고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