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업계에 분사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오는 2002년까지 분사할 예정인 반도체업체는 5∼6개사에 이를 전망이다.
이같은 분사 움직임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전문성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확보함은 물론, 투자재원 확보와 자산가치 상승을 꾀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외국업체들의 분사 바람은 덩치가 커진 국내 반도체업체들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현황=올 3월 지멘스에서 분리된 D램 전문업체 인피니온테크놀로지를 시작으로 내년까지 분사를 마무리하겠다고 발표한 반도체회사는 루슨트테크놀로지스, 커넥선트시스템스, 퀄컴 등 3개사. 앞으로 분사를 고려하고 있는 회사까지 포함하면 5∼6개사로 늘어날 전망이다.
통신 반도체 및 시스템 전문업체인 루슨트테크놀로지스는 최근 내년 초 분사예정인 반도체회사명을 아기어(Agere)시스템스로 확정하고 내년 1·4분기까지 주식 상장을 마무리할 방침이다.
아기어시스템스는 무선, 네트워킹 및 컴퓨팅 애플리케이션용 집적회로(IC)와 통신망용 광부품에 주력할 계획이다.
커넥선트시스템스는 내년 1월중으로 네트워크 관련 반도체사업을 담당한 네트워크액세스사업부를 분사하면서 무선통신과 퍼스널이미지사업 중심으로 재편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커넥선트는 기존의 GSM 솔루션은 물론, 광대역코드분할다중접속(WCDMA), 블루투스(Bluetooth), 지리정보시스템(GPS) 솔루션에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퀄컴도 내년 중반까지 퀄컴통신사업부(QCT)를 분사할 방침이다. 스핀코(Spinco)로 잠정 명명된 QCT는 제품 개발과 영업에 주력하고 퀄컴 본사는 로열티와 재정문제를 전담하게 된다.
필립스·NEC 등도 반도체사업부의 분사 여부를 신중히 검토중이다.
종합가전업체인 필립스는 전체 수익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성이 뛰어난 반도체부문의 분리압력을 투자자들로부터 거세게 받고 있다.
NEC는 지난해 92억달러의 매출로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한 반도체부문 분리를 고려중인데 향후 실적 평가 후 2002년까지 NEC일렉트론 반도체부문을 분사할 예정이다.
◇ 배경=대형 외국 반도체업체들의 분사배경은 전문성 강화, 조직정비 및 슬림화, 자산가치 증대로 풀이된다.
루슨트테크놀로지스·커넥선트시스템스·퀄컴은 전문성 강화 차원의 분사 성격이 짙다.
루슨트테크놀로지스에서 분사할 아기어시스템스의 존 딕슨 사장 겸 최고경영책임자(CEO)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장에서 고객의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분사의 이유를 설명했다.
커넥선트는 네트워크액세스사업부를 독립시켜서 갈수록 늘어나는 무선통신 및 이미지 관련 시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퀄컴도 제품의 개발과 영업에서 혼선을 빚었던 로열티 문제를 퀄컴 본사가 도맡아 스핀코의 역량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NEC와 필립스는 가전 및 반도체 거대기업으로 야기되는 힘의 분산을 막고 분사를 통해 조직정비와 슬림화를 꾀한다. NEC는 특히 종합가전그룹에 종속적인 일본 반도체업체의 속성이 경쟁력 약화를 가져왔다고 판단하고 분사를 통해 가격경쟁력 상승을 기대한다.
자산가치의 상승효과도 이들 업체가 분사를 통해 기대하는 부수적인 효과다.
가전 및 반도체 등 7개 부문으로 이뤄진 필립스는 회사 총매출의 40%를 가전제품에서 얻고 있으나 수익성이 낮은 반면 매출의 16%를 차지하는 반도체에서 수익의 50%를 올린다.
이 때문에 분리 후 자산가치의 상승을 기대하는 투자자들로부터 반도체부문 분리압력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 이같은 가능성은 지멘스가 지난 3월 이 회사 반도체부문인 인피니온테크놀로지스를 분사하면서 여실히 입증됐다. 지멘스는 분사를 통해 370억달러 규모의 새로운 회사를 탄생시켰으며 지멘스의 주가도 15%나 급증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 전망=외국 대형 반도체업체들의 분사는 국내업체와의 치열한 경쟁을 예고한다. 첨단기술과 대규모 자본으로 무장한 이들 반도체업체들이 분사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할 경우 일본 기업과 같이 종합적인 형태를 띤 국내업체들에 위협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대부분의 업체가 주력하는 통신용 반도체시장은 치열한 경쟁의 도가니로 치달을 전망이다.
분사 바람은 또 반도체산업의 수평적 분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미 개발·제조·패키지·테스트·위탁생산 등 반도체산업이 갈수록 전문화·세분화되는 상황에서 이들 업체의 분사는 이같은 추세를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체간 과당경쟁에 의해 분사한 업체끼리 재합병되는 시나리오도 간과할 수 없다. 최근 LG와 필립스의 디스플레이부문 합병, 삼성과 NEC의 제휴 등이 그 예다.
<김인구기자 cl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