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소동락 인터넷 백일장>장원-백운경

이름 : 백운경

주민등록번호 : 840114-*******(계원예술고등학교 2학년)

주소 :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4-9 청화아파트 B동 401호(135-100)

이 세상 하나뿐인 나의 할머니에게!

할머니 그동안 잘 지냈어? 나 안보니까 속 시원해?

할머니는 나 안봐서 좋을지 몰라도 나는 할머니가 너무너무 보고싶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다섯달이 됐어. 하긴, 여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었으니까. 그때 피어있던 그 초록빛 무성한 잎사귀들이 이젠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어. 그 뜨거운 바람이 어느새 매서운 바람으로 변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얼리려 하고 있어. 차갑게 식은 엄마와 나의 마음과 같아지도록 말이야.

할머니가 떠난 후론 날씨가 맑은 날이면 언제나 눈물이 나. 할머니가 떠나가던 그 날도 구름 한 점 없는, 야속하리만큼 청명한 날씨였거든. 난 원래 비오는 날 싫어하는데 그 날만은 「비라도 주룩주룩 왔으면…」 하고 하늘에 빌었어. 근데 할머니를 묻고 돌아설 때까지 하늘은 날 비웃듯 더욱 더 화창하게 변해 있었어.

할머니가 그렇게 떠나가자 엄마와 나는 서둘러 이사를 했어. 골목길만 바라보면 할머니가 걸어 올라올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어.

엄마는 특히 더했지. 손녀인 나보다야 딸인 엄마의 마음이 훨씬 더 아팠을 테니까. 아니, 남아있는 사람보다야 엄마와 날 두고 혼자 떠나가는 할머니의 마음이 더 아팠을거야.

우린 조금이나마 할머니 생각을 덜기 위해 이사를 택했어. 20년이 다 되어가는 그 동네를 떠나 지금의 동네로 이사했어. 예전 지하에서 아파트 4층으로 이사갔어.

조그마한 방이지만 방도 3개로 늘어났어.

햇볕도 안드는 지하방 2칸에서 5년, 단칸방에서 8년….

그 긴 시간을 할머니, 엄마, 나 그렇게 셋이서 같이 살았었는데…, 그때는 비록 집은 좁고 힘들었지만 행복했었어. 그런데 이번엔 넓고 더 좋은 집으로 가는 데도 마음이 너무 아팠어. 어려웠지만 할머니와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이 그리워져.

단칸방에서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같이 버텨 주던, 추운 겨울날 학원에서 늦게 돌아오는 이 손녀를 기다려 주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꼭 우리가 이사간 후에 할머니가 날 찾아와 줄 것만 같아서, 그런데 내가 없으면 슬퍼할 것 같아서, 이삿짐차에서 계속 뒤를 돌아봤어.

이제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올 수 없는 먼 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믿기지가 않아서. 아니, 믿고 싶지 않았어. 어디선가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올 것 같고, 이 땅 어느 곳엔가에서 날 기다릴 것 같아서.

이번 여름 할머니가 부산 가기 전에 약속했잖아.

빨리 와서 여름방학 때 할머니 더 힘없어지기 전에 우리 둘이서 여행가자고.

그런데 나만 두고 할머니 혼자 그렇게 멀리 가버리면 남은 난 어떡하지?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할머니 혼자 가면 너무 춥고 외로울텐데, 우리 할머니 어떡하지?

날 보고 싶어할 텐데, 그래도 난 할머니한테 갈 수가 없는 걸…. 만나지 못해도 좋고, 이야기 나누지 못해도 좋아. 이 같은 하늘 아래, 아니, 지구상의 어느 곳인가에 나의 할머니가 있다는 그런 믿음만이라도 가질 수 있었음 좋겠어. 같은 이 세상의 공기로 숨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그런 바램들도 가질 수 없게 됐다.

이런 걸 때늦은 후회라 하는 거겠지.

할머니! 나 1년만 있으면 졸업하는데, 초등학교 졸업 때도 중학교 졸업 때도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던 할머니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1년 뒤엔 지금보다 더 견디기 힘들어질 것 같애. 내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합격하는대로, 사회에서 성공하면 성공하는대로 할머니가 갈수록 그리워질거야. 함께 고생했던 그 기억들은 영원히 내 곁에 머무를 테니까.

내가 약속했었잖아. 내가 돈 벌면 할머니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옷 다 사주고, 가고 싶다는 곳에 다 데려가 주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준다고, 그 때까지만 아프지 말라고. 미국이든 유럽이든 돈이 얼마가 들든, 어떻게 해서든 낫게 해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앞으로 한 2년만 건강하라고 그렇게 부탁했잖아.

아빠 없는 내가 불쌍해서 눈도 못감는다고 말했었잖아. 엄마랑 나만 놔두고 애가 목에 걸려서 절대 못간다고 말해 놓구선. 내가 그렇게 불렀는데…. 할머니 나 두고 가지 말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었는데….

하늘은 나에게서 아빠를 데려간 대신 할머니를 보내줬다고 생각했어. 이 세상 어느 아빠 못지 않은 할머니를 보내줬다고…. 근데 할머니마저 가버리면 난 의지할 곳이 없는 걸. 존재하지 않는 아빠, 언제나 아파 병 땜에 고생하는, 36㎏인 엄마에게 기댈 순 없잖아.

할머니는 나의 기둥이었어. 아주 든든한 나만의 기둥 말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 어느 집에 아주 오래된 기둥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은 그 기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지 못한 거야. 늘 있어왔던 기둥이니까. 언제까지라도 그 자리를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착각해 왔던 거야. 근데, 어느날 갑자기 그 기둥이 오래되어 부서져버리자 그제서야 그 집은 깨달은 거야. 자신이 무관심했음을. 그 기둥은 그렇게 늙어 자신의 몸이 부서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희생하며 서 있었다는 걸. 그런데도 자신은 눈치조차 못챘다는 걸. 그리고 그 오래된 기둥 하나가 그 집의 전부를 지탱시키는 힘이었다는 걸 말이야. 난 아무래도 둔한가봐. 사람이라면서 그런 진리를 이제야 깨달았으니 말이야. 할머니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난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어. 같은 집에서 17년을 같이 산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니, 아픈 곳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어. 차라리 나한테 만이라도 말하지 그랬어? 혼자 아파하지 말고 나한테 만이라도 말하지. 바보같이. 날 위해 죽을 때까지 내 걱정만 하고 간 할머니.

할머니는 언제나 내 옆에서 나를 지켜주고 돌봐줄 거라 믿었어.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떠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벌받았나봐.

할머니! 난 돈 벌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있어. 뭔지 알아? 할머니 유골을 그 엉성한 납골당에서 모셔와 이쁜 풍경 있는 곳에, 유리로 되어서 밖이 환히 내다보이는 곳에 옮겨주는 거야. 지금 할머니가 있는 곳은 너무 썰렁하고 엉성해. 내 사물함보다도 작아서 꼭 신발장 같애. 그리고 철로 되어 있어서 바깥도 안보이잖아.

할머니도 답답하지? 밖에 있는 내가 봐두 너무너무 답답하고 갑갑해 보여. 할머니가 그랬잖아.

조그마한 방이라도 자기 방 갖는 게 평생 소원이라고.

우리 집에서도 말이 할머니 방이었지, 방 2칸에 네 방 내 방이 어디 있었겠어. 그래서 할머니가 늘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할머니만의 방을 갖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내가 할머니 큰 집 사준다고 그랬었잖아.

이제 그런 약속을 들어주어도 기뻐해줄 사람이 없게 됐다. 이제부터 할머니가 있어야 할 곳이라도 더 넓고 편안한 곳으로 옮겨줄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내가 할머니를 데리러 가는 그날까지….

할머니! 이제 다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겠지만, 할머니는 내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거야.

정말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추신 : 할머니가 어느 곳에 있든 날 지켜보고 있을거라 믿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2000년 12월 1일

할머니의 사랑하는 손녀 운경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