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증시결산>1회-주가폭락

2000년 서울증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닥친 한파 증시였다. 또한 기대와 허탈이 동시에 교차된 암울한 한해였다. 거래소시장은 연초대비 반토막이 된 지 오래전이며 코스닥시장은 4분의 1 가까운 주가 폭락세를 연출했다. 개별종목 중에는 10분의 1 이상 손실종목도 수두룩해 투자자들의 겨울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2000년 서울증시는 그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한 한해로 기억될 것이다. 2000년 주식시장을 8회에 걸쳐 결산한다. 편집자

「거래소시장은 연초대비 절반, 코스닥은 4분의 1 수준.」 올 한해 주식시장의 성적표다.

2000년 1월 4일, 99년에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온 주식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희망과 기대감을 갖고 출발했다. 이날 주식시장은 「거래소 1059.04, 코스닥 266」으로 마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거치면서 내성을 다져온 주식시장은 99년에 이어 2000년 개장 첫날 거침없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느 누구도 서울증시가 폭락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지 않았다. 정부와 투자자는 주식시장의 메커니즘을 잊은 채 장밋빚 꿈에 젖어있었다.

2월까지 증시는 지루한 공방전을 벌였다. 거래소시장은 990∼890선에서 등락을 거듭했으며 코스닥은 260∼190선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나 증시하락의 조짐은 곳곳에서 감지됐다.

연초에 미국에서 불어닥친 「닷컴거품론」이 태평양을 건너 코스닥시장을 강타했으며 정부의 코스닥등록 완화조치로 신규 등록기업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수급불균형의 우려를 자아냈다. 또 벤처캐피털을 비롯, 기관들이 이익실현을 위해 대량매도를 했으며 정부의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위태위태한 서울증시에 일격을 가한 것은 2월 28일 대우채 편입 수익증권 3차 환매사건이었다. 99년 7월 19일 대우의 구조조정 발표 이후 자금난을 겪어온 대우는 이날 자금고갈을 공식 선언했던 것.

이는 증시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 대폭락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특히 거래소시장은 단숨해 60포인트 이상 하락했다. 5월 24일 발생한 새한그룹 워크아웃은 거래소시장의 회생을 완전히 차단하면서 800선 붕괴를 가져왔다.

이후 거래소시장은 현대 구조조정 지연과 국제유가 상승, 미국증시 약세 등의 악재가 연이어 터지면서 지지선으로 여겼던 700선이 9월에 무너졌으며 10월에는 환율상승과 내년 경기둔화 우려 등이 겹쳐 600선이 붕괴되는 급락장세를 보였다.

6월 남북정상회담 등의 호재로 한때 800선까지 회복하기도 했지만 악재에 저항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코스닥시장은 등락을 보이면서도 2월말까지는 200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새한그룹 워크아웃 발표에 따라 그동안 잠복해온 닷컴거품론과 수급불균형이라는 대형악재가 불거지면서 200선이 거침없이 무너졌다.

봇물 터지듯 무너지기 시작한 코스닥시장은 이후 상반기동안 거래소시장과 동반양상을 보이면서 120선까지 하락, 첨예화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보이면서 사회문제화되기 시작했다. 주가폭락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려는 편법과 탈법이 코스닥시장을 흔들어놓았다. 설상가상으로 10월 정현준 파문과 11월 진승현 사건은 코스닥시장을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면서 100선 붕괴에 결정타를 날렸다.

그에 앞서 코스닥시장은 하반기 들어 예기치 못한 반도체가격 하락으로 또 한차례 폭락장세를 연출, 8월 120선이 허물어졌다. 이후 8월과 9월 장세는 현대문제 등 국내외 대형악재가 발생하면서 거래소와 동반양상을 보이면서 100선이 무너졌다.

김경신 대유리젠트증권 이사는 『2000년 서울증시는 희망이 절망으로 변해버린 한해였으며 올해처럼 증시가 등락을 거듭한 적은 없었다』며 『악재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호재가 제대로 힘 한번 발휘하지 못한 한해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봉영기자 byy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