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15회-물고물리는 별들의 전쟁

일본의 디지털 패권을 향해 탄탄대로를 걷는 NTT도코모의 앞길을 가로막고 나선 건 엉뚱하게도 소니였다.

무슨 소리인가. 무선휴대전화와 게임기가 어떻게 경쟁 상대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장이나 머잖아 두 제품은 하나의 통신네트워크로 통합될 전망이다.

인터넷 네트워크 단말기를 놓고 양측의 대표주자가 정면 대결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NTT도코모의 무선휴대전화 「i모드」가 불과 2년도 채 안돼 1400만명에 육박하는 가입자를 확보하는 동안 소니의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 1, 2」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누적 판매대수 2000만대를 돌파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기존의 게임기와 전혀 다르다. 인터넷상에서 다른 사용자와 게임을 할 수 있어 인터넷 단말기로도 쓸 수 있다.

특히 플레이스테이션2는 인터넷 접속에다 디지털비디오디스크(DVD)기능까지 망라해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강력한 통신네트워크 표준이 새로 등장한 것이다.

i모드 역시 야후 등의 포털사이트를 거치지 않고도 인터넷 정보 검색이 가능해 인터넷접속 휴대전화의 새로운 표준으로 각광받고 있다.

오보시 고지 NTT도코모 회장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가 경쟁 상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집안에 어린이가 없어 이 제품을 볼 수가 없었던 데다 그저 그런 신형 게임기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이 지난 봄 최고경영자(CEO)로 승진하면서 인터넷 사업에 전념한다고 할 때에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이제 오보시 회장은 위기감을 느낀다. 소니는 게임기를 인터넷 단말기로 활용한다면서 인터넷 포털서비스를 위해 3개의 인터넷 회사를 설립했다. NTT도코모와 정면으로 맞붙자고 나선 것이다.

오보시 회장은 측근들에게 서둘러 소니의 속셈과 경쟁력을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보고 내용은 놀라웠다. 플레이스테이션의 성능이 웬만한 고성능PC보다 나으며 i모드를 제칠 인터넷단말기로 급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었다.

오보시 회장을 긴장시킨 것은 다른 게임기업체들의 가세다. 소니에 일격을 당한 세가나 닌텐도는 물론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까지 플레이스테이션과 게임기 시장에 진출했다.

「왜 우리를 따르는 회사는 없는 데 소니를 뒤쫓는 회사가 이다지도 많은가.」 오보시 회장에게 뭔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의 불안은 i모드의 성공이 일본내에만 그치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서비스의 특성상 i모드는 해외시장의 개척에 한계가 있다. 각국마다 무선인터넷 사업에 대한 규제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플레이스테이션은 달랐다.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가가 치솟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소니 제품 가운데 이처럼 인기를 모은 제품은 워크맨 밖에는 없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이 글로벌한 국제적인 인터넷단말기로 성큼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오보시 회장은 그렇지만 소니의 제품이 그 정도까지 가려면 당분간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봤다. 통신네트워크의 구축과 콘텐츠 확보는 시작하자마자 뚝딱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보시 회장은 소니가 더 이상 강력해지기 전에 모종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IMT2000서비스다.

그는 미국의 보이스스트림을 비롯해 홍콩 허치슨텔레콤, 한국의 SK텔레콤 등 해외 통신서비스업체와의 제휴를 한층 강화했다. 차세대 무선이동통신시장에 대한 강력한 망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인터넷통신 네트워크와 서비스를 통합한 일체형 서비스를 서둘러 마련키로 했다. 소니와 같은 업체가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한다는 전략이다.

이데이 소니 회장은 애써 NTT도코모를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괜한 위기감만 불러일으켜 봤자 이득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당장 경쟁자로 떠오른 세가, MS 등을 따돌리는 게 급선무였다. 특히 MS가 두려웠다. 자사보다 먼저 인터넷접속 게임기를 내놓은 세가를 꺾었으나 MS와는 싸워본 적이 없다.

이 사업의 성패는 콘텐츠로 가름되는데 MS는 아무래도 높은 지명도에 미국 업체

라는 점에서 강력한 콘텐츠를 확보하는 게 용이하다. 소니도 미국에서 영화, 음반 사업을 통해 콘텐츠를 확보해 왔으나 아무래도 미국 업체들의 팔이 안으로 굽지 않겠는가.

이데이 회장은 일단 선점한 이 시장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만 해도 게임기 시장은 물론 차세대 인터넷 단말기시장에서도 최고 업체로 우뚝 설 것이라고 믿었다.

소니의 파상적인 게임기 공세에 긴장한 것은 NTT도코모만이 아니었다. 마쓰시타전기 역시 소니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두 회사는 일본 전자산업의 양대 지주로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우리로 치면 삼성전자와 LG전자다.

두 회사의 갈등은 80년대 VCR 규격논쟁에서부터 90년대 DVD와 최근의 메모리카드에 이르기까지 지속돼 왔다. 거의 모두 마쓰시타의 승리였다. 소니와의 싸움에서 도시바가 선봉에 섰으나 그 배후에는 마쓰시타가 있었다.

그런데 소니가 올해 출시한 플레이스테이션2에 DVD 기능을 추가했다. 마쓰시타는 발끈했다. DVD에서 마쓰시타는 소니를 훨씬 앞질렀는데 소니가 게임기의 성공을 발판으로 DVD 시장을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여름 취임한 나카무라 구니오 마쓰시타 사장은 소니의 끊임없는 독자 행보가 늘 눈에 거슬렸다. 「이들은 꼭 뭐든지 혼자 놀려 한단 말이야. 몇번의 싸움에서 졌으면 승복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만 나카무라 사장은 소니만 탓할 입장은 아니었다. 자사의 시장을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특히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은 마쓰시타가 집중 육성하는 디지털세트톱박스 시장에 암운을 드리웠다.

나카무라 사장은 소니와의 경쟁 요소를 조목조목 따져봤다.

솔직히 소니는 상대하기에 너무 강력한 상대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다.

소니와 전면전을 벌일까도 생각했으나 이내 접었다. 전략을 수정했다. 소니가 하드웨어에서 네트워크, 콘텐츠, 서비스 등 광범위한 플랫폼을 만들고 있는데 마쓰시타는 다른 회사와의 제휴에 집중키로 했다. 그 대신 어느 분야에서나 꼭 필요한 사업에 집중키로 했다. 시스템칩이나 중간단계의 하드웨어가 그것이었다.

갑자기 도래한 인터넷시대는 일본의 산업계 판도를 확 바꿔놓고 있다.

기존의 경쟁구도가 사이버상으로 그대로 옮겨지는가 하면 새로운 경쟁구도도 생겨났다.

마쓰시타-소니 경쟁은 인터넷시대에서 달라지지 않는 경쟁구도의 대표적인 예다. NTT도코모-소니 경쟁은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인터넷시대로 인해 불거졌다.

일본 산업계가 인터넷의 충격에 휩싸인 것은 야후재팬 때문이었다. 이 회사는 지난해 4월 한때 하루에 주가가 1억원이나 치솟았다. 이 회사의 모기업인 소프트뱅크는 도요타, 소니, NTT, 후지쯔 등을 제치고 시가 총액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동안 인터넷을 단순한 생산성 향상 도구로만 여겼던 일본 산업계는 인터넷을 다시보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이 인터넷 사업에 본격적인 발을 담갔다. 그러나 인터넷포털서비스 같은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익성도 없어 보인 데다 어차피 야후나 라이코스같은 미국 업체와 경쟁해 이길 자신도 없었다.

그 대신 수익성이 검증된 인프라, 단말기, 콘텐츠, 솔루션 등의 분야에 투자를 집중했다. 1년여 만에 판도는 다시 대기업 구도로 바뀌었다.

그 사이 새로운 경쟁구도가 생겨났다.

통신인프라를 독점하던 NTT는 전화가 가능한 송전선을 앞세워 통신사업에 진출한 동경전력이라는 새로운 경쟁자를 만났다.

일본의 양대 컴퓨터업체인 NEC와 후지쯔는 인터넷에서도 역시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이제는 인터넷 회사로 발 빠르게 전환한 후지쯔를 NEC가 뒤쫓아가려 애쓴다는 점이다.

전자업계뿐만 아니다.

은행창구나 ATM에 가지 않고도 인터넷으로 금융거래할 수 있게 되면서 은행들은 해외 은행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됐으며 노무라, 다이와 등의 증권사들은 금융자유화의 바람을 탄 신흥 인터넷 증권사들과 경쟁하고 있다.

인터넷상품의 새로운 물류 거점으로 떠오른 편의점 업체들도 저마다 종합상사, 은행과 연합해 경쟁을 벌여 기존 판도에 적잖은 변화를 예고했다.

불과 2, 3년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경쟁은 곧 체질 향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경쟁을 통해 일본의 인터넷 사업은 이제 막 기지개를 폈다.

아직까지 자국내에 한정됐으나 머잖아 해외로도 뻗어나갈 전망이다.

일본의 인터넷 사업이 미국이나 한국의 그것과 다른 것은 벤처기업의 역할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고작해야 소프트뱅크나 히카리통신 등을 꼽을 수 있으나 최근에는 시들해졌다.

이점 일본의 인터넷 사업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으나 일본 산업계는 콧방귀만 뀌고 있다.

「온라인 경쟁력도 결국 오프라인의 힘에 나오는 게 아닌가.」 일본 산업계의 생각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일본에 비해 인터넷에서 앞섰다는 한국이 긴장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