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업계의 설비투자가 양극화하고 있다.
일부 업체들은 종전과 다를 바 없이 생산물량을 확대하는 쪽으로 공격적인 투자를 추진하고 있으며 다른 한켠에서는 수익성 위주로 투자계획을 축소조정하고 있다. 물량 확대 진영에는 미국·유럽·대만업체들이 포진해 있고 수익성 위주의 투자 진영에는 일본업체들이 서 있다. 국내업체들은 삼성전자가 확대전략을, 현대전자는 수익성 위주로 투자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반도체업체들의 투자전략이 이처럼 엇갈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시장전망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업체들의 투자전략에도 혼선이 빚어지는 것』이라면서 『2002년 이후에 업체마다 희비가 엇갈릴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또 이처럼 업체들이 서로 다른 투자전략을 펼침으로써 장기적으로 거의 모든 업체가 동시에 투자를 확대하거나 축소함으로써 발생하는 반도체경기사이클(이른바 실리콘사이클)이 붕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물량을 늘려라=공격적인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업체들로는 인텔·텍사스인스트루먼츠(TI)·IBM·ST마이크로·필립스·삼성전자·TSMC·UMC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회사의 공통점은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나 디지털신호처리기(DSP), D램, 수탁생산(파운드리) 등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회사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1년여 동안 생산이 부족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여기에서 거둔 막대한 이익을 고스란히 차세대 투자에 쏟아부으려 하는 것이다.
인텔은 애초 계획한 아일랜드의 12인치 웨이퍼 공장 건설을 연기했으나 올해와 비슷한 규모인 60억달러를 내년에도 설비투자에 집중할 계획이다. IBM은 사상 최대인 50억달러를 반도체 설비투자에 책정했으며 삼성전자 역시 올해보다 1조원 정도 늘린 6조7000억원을 내년에 반도체부문에 투자할 방침이다. 대만의 TSMC와 UMC도 급증하는 파운드리 수요에 대응해 각각 40억달러와 30억달러를 내년에 신규투자할 계획이다.
한동안 신규투자를 억제해온 필립스·ST마이크로·인피니온 등 유럽업체들도 내년부터 신규투자를 재개할 방침이며 차세대 공정기술 개발을 위해 현지업체와의 공동 개발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이들 회사의 신규공장은 내년 말 또는 2002년 상반기에 본격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들 회사는 최근 주춤한 반도체 경기가 내년 하반기에는 다시 활성화하고 이 시장을 확실히 장악할 것으로 믿고 있다.
◇ 수익성이 먼저다=일본업체와 대만의 메모리업체, 그리고 현대전자 등은 내년에 신규공장 투자를 억제하는 대신 장비 업그레이드, 수율 향상, 제품 다변화 등을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
최근 불어닥친 반도체 불황으로 수익성이 떨어져 이를 끌어올리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기 때문이다. 특히 12인치 웨이퍼 공장의 경우 투자비가 막대해 신규투자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NEC·도시바·히타치 등 일본업체들은 투자비가 많이 드는 D램 생산을 줄이는 대신 디지털TV 등 디지털 가전제품과 휴대단말기용 시스템IC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일본업체들은 신규공장 건설보다는 기존 라인의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 꼭 필요한 신규투자의 경우 다른 업체와의 제휴 및 분사를 통해 재원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NEC와 히타치가 공동 출자해 D램 전문업체인 엘피다메모리를 설립, 12인치 웨이퍼 공장을 신설하는 것이나 도시바가 분사를 검토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모젤바이텔릭·난야테크놀로지·윈본드 등 대만의 D램업체들도 D램 가격의 하락으로 수익성이 격감하자 12인치 웨이퍼 신규공장 투자계획을 6개월 이상 늦추고 있다.
현대전자의 경우 유동성 위기 극복이 선결과제여서 내년에 신규투자보다는 장비 업그레이드에 주력하기로 했다.
현대전자의 한 관계자는 『시장전망이 불투명해 투자의 위험성이 큰데다 시장경쟁의 격화로 원가 경쟁력을 높일 필요성이 있어 수익성을 높이는 데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현대전자를 비롯해 신규투자를 자제하려는 반도체 회사들은 내년 하반기 이후 시장이 활성화할 경우 자칫 경쟁사들에 시장을 내줄 수 있어 경쟁사들의 투자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