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장비업계, 세트업체 가격인하 요구에 어려움

부품 및 장비 생산업체들이 경기침체에다 대기업의 공급가격 인하요구라는 이중고로 심각한 어려움을 맞고 있다.

2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최근들어 경기침체속에서 삼성전자·LG전자·현대전자 등 대형 완제품 및 반도체 소자업체들이 2001년도 부품 및 장비 발주물량에 대한 가격인하 요구를 거세게 가하고 있으나 부품 및 장비업체들은 이에 대한 뚜렷한 대응책이 없어 몸살을 앓고 있다.

세트업체의 가격인하 요구는 해마다 있는 일이긴 하지만 올해의 경우에는 예년과 달리 10∼20% 정도의 가격인하를 요구하는 등 IMF 직후를 연상케 하는 무리한 가격인하 요구가 많아 부품 및 장비업체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 반도체 장비업체=반도체 장비·재료업체들은 반도체 소자업체들이 지난 IMF사태 당시 내린 장비·재료가격을 환원시켜주지 않은 상태에서 최근의 경기침체를 이유로 들어 공급가격을 낮추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고 있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오히려 국내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올해 수천억∼수조원의 이익을 내고도 정작 장비·재료업체들에는 장비·재료의 제값을 쳐주지 않는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장비업체들은 거래를 지속하기 위해 소자업체들의 요구에 제대로 불만조차 토로할 수 없어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반도체 장비·소재를 생산하는 H사는 올해 시장호조로 매출액이 지난해에 비해 30∼40% 늘었어도 별로 흥이 나지 않는 분위기다. 매출액이 증가한 만큼 이익은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회사 영업부의 C팀장은 『IMF사태 당시 국내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고통분담을 이유로 제품 가격인하 요구를 따랐는데 IMF사태가 지난 지금까지 가격을 0.01%도 올려주지 않았다』면서 『반도체 소자업체들이 엄청난 이익에도 불구하고 최근 경기침체를 이유로 오히려 더 낮출 것을 요구해 난감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장비·부품을 생산하는 Y사의 경우, 얼마 전 제품 성능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수십억원을 들여 청정실(클린룸)을 포함한 신공장을 지었으나 반도체 제조업체 관계자로부터 공장시설과 상관없이 제품을 싸게 공급하는 업체와만 거래하겠다는 답변을 들어 난감해하고 있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소자업체에게 항변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경우 당장 「내일부터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만 들을 것 같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반도체 장비업체의 한 사장은 『국내 중소 장비업체들이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의 연구개발비와 고급인력을 투입해 제품을 국산화하면 소자업체들은 국산화한 제품이니 외국의 동종장비보다 가격이 많이 저렴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무조건 가격인하를 요구한다』며 『이럴 경우 외국 대형업체에 비해 자금력이 없는 국내 장비업체들은 제품을 국산화하자마자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일반 부품업체=인쇄회로기판(PCB) 생산업체들은 최근 세트업체가 내년도 공급물량을 대해 10%가 넘는 가격인하 요구를 해옴에 따라 세트업체의 가격인하 요구폭을 줄이기 위한 협상에 적극 나서는 한편 원판 등 PCB 재료 공급업체에 대해 공급가격 인하를 요청하고 있다.

PCB 생산업체들은 그러나 구매물량이 많은 세트업체의 가격인하 요구가 워낙 거센데다 대기업인 원판 생산업체와의 가격협상도 만만치 않아 이중고를 겪고 있다.

지속적인 부품가격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트랜스포머 생산업체들도 최근 세트업체들이 내년도 공급물량에 대해 15∼20% 정도의 가격인하를 요구해옴에 따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트랜스포머업체인 D사의 한 관계자는 『올해 세트업체의 가격인하 요구는 정도가 지나친 수준』이라며 『세트업체의 가격인하 요구를 액면 그대로 수용할 경우 채산성이 맞지 않아 제품 생산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스위칭모드파워서플라이(SMPS)와 콘덴서 등 일반 부품업체들도 PCB와 트랜스포머 생산업체들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아 내년에는 경기침체에 따른 매출부진과 세트업체의 가격인하 요구로 인한 채산성 악화로 고전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김성욱기자 swkim@etnews.co.kr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