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메일 솔루션 전문 개발업체인 에이스넷의 이은창 사장(34). 최근 국내외에서 호평받는 자사 제품의 본격 마케팅을 위해 지난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소프트엑스포 2000」에 참가했다.
이미 제품의 우수성과 기술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은 터라 이 사장은 행사기간 내내 의기양양하게 부스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나흘의 관람기간에 부스를 다녀간 바이어는 손에 꼽힌다. 그나마 모두 가격조건만 알아보곤 발길을 돌렸다. 『좋은 제품만 만들면 다 잘 팔릴 줄 알았죠. 홍보니 마케팅이니…그런 건 저희같은 개발자 출신 사장들은 잘 몰라요.』
결국 이 사장은 요즘 있는 지연, 없는 학연 다 동원해가며 마케팅에 주력한 끝에 한 대기업에서 제품 설명회나 한번 갖자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기술개발비로 잡혀있는 적잖은 비용이 접대비 등 이른바 「마케팅 비용」으로 고스란히 새어 나갔다.
학연·지연·혈연 등을 따지는 우리의 관행은 인터넷·벤처 비즈니스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같은 아날로그적 인습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e비즈니스의 뒷다리를 잡고 있다.
중소기업 글로벌 e비즈니스 전문 컨설팅업체인 비즈센스의 미국인 사장 넬슨 앨런씨는 지난해 한국에서 e비즈니스를 시작하며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혔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내 자금유치를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수년간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해왔고 아내 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투자자들에게 주지시켰지만 언젠간 떠날 사람으로 취급하더군요.』 결국 앨런 사장은 자신과 동료들의 자금을 모아 55만달러의 설립자본금으로 회사문을 열었다. 『앞으로도 한국에서의 자본유치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의 이같은 배타성은 특유의 민족성에서 기인한다는 분석도 있다. 거북선·고려청자·이조백자 등은 우리 민족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유산이다.
하지만 이들은 한 시대 유물로만 남아있고 오늘날 그 제작법은 전수되지 않고 있다. 관련 노하우를 장인(匠人)만의 기술로 인식해 후대에 전수하지 않은 결과다. 중세 서양의 「마이스터」가 도제(徒弟)제도를 통해 해당 기술을 조직적으로 전수한 것과 비교된다.
현대사회를 정보시대라고는 하지만 우리사회의 정보독점 성향은 과거 기술독점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오늘날 개인주의나 보신주의와 맞물려 최근 「정보화격차」가 신종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단순한 지식과 정보의 습득차에 머물지 않고 소득격차로 이어져 새로운 사회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고급정보에 접근이 용이한 점을 부의 축적과 세습에 이용한다. 빈곤의 악순환과 대물림은 디지털 사회서도 더욱 치밀하고 견고하게 이어지고 있다.
e코리아를 보는 시각은 달라야 한다. 전통 산업사회의 잣대와 방식으로는 미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칫 디지털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최근 재정경제부의 전자상거래 부과가치세 부가 움직임,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온·오프라인 서점간 마찰 등이 디지털시대 아날로그의 시각차를 그대로 드러낸 일련의 사례들로 꼽힌다.
인터넷상에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른바 「사이버로펌」이 요즘 부쩍 일반인들 사이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이버로펌을 운영하는 변호사를 바라보는 기존 「오프라인」 법조계의 시각은 차갑다.
현행 변호사법이 변호사의 회사 대표이사 겸직을 금하고 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다. 하지만 사이버로펌 업계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법조계에는 수구적 보신주의가 만연해 있다』며 『우리 사회의 기득세력일수록 디지털 환경으로의 변화를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일선 교육현장에서도 이러한 걸림돌은 흔히 볼 수 있다. 최근 국내 대학들은 컴퓨터나 인터넷 활용능력 등을 학점 이수와 함께 졸업의 필수요건으로 꼽고 있다. 이제는 IT 활용능력이 일정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졸업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작년초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2001년부터 소정의 정보화 관련 학점을 이수하거나 자격증을 따야 졸업할 수 있는 「대학정보인증제」를 전국 4년제 대학에서 실시한다는 내용을 발표한 바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학생과 학생회측의 반발도 만만찮다. 실제로 작년에 모대학 졸업예정자는 인증제에 저촉돼 정식 졸업이 불허되자 해당 대학을 상대로 「학사학위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물론 이 학생은 법정서 패소했지만 이후 대학의 적극적 개혁작업은 상당부분 위축됐다는 평이다.
대학 관계자들은 『우리가 학생들에게 바라는 수준은 그리 엄격하거나 높지 않다』며 『외국대학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가혹한 학사관리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사회와 달리 e코리아의 추진에너지는 석유도 원자력도 아닌 「사람」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 교육의 병폐는 곧 e코리아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 만큼 심각하다. 특히 교육은 단기간의 집중투자와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것이 e코리아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벤처업계의 한 관계자는 『벤처기업의 특성상 필요한 인재를 바로 뽑아 즉시 현장에서 쓸 수 있어야 하는데, 대학을 갓 졸업한 인력들은 마땅히 배치할 자리조차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벤처 중 기존 오프라인 업체나 대기업과 같이 다년간 인재를 키워 활용한다는 생각을 갖는 「여유로운」 업체는 이제 한 곳도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따라서 관련 전문가들은 현행 「6-3-3-4」의 학제를 보다 가변적으로 바꿔 급변하는 정보시대에 적시 대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20년 가까이 제도교육의 틀 속에 가둬놓기보다는 컴퓨터고, 게임고, 멀티미디어고 등 특수학교의 과감한 설립으로 다양한 「선택거리」를 미리 제시, 자라나는 세대들이 다가올 전문화 시대에 적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