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를 맞아 국내 전자산업지도가 바뀌고 있다. 벤처붐을 타고 백두대간을 따라 IT밸리가 형성되고 있다. 한반도 산업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성격이 다른 전자업체가 주축이 돼 한 곳에 몰려 있던 산업단지가 IT분야를 중심으로 전문화되고 있다. 서울 강남 테헤란을 중심으로 인천·대전·춘천 등지로 뻗어가는 벤처밸리가 형성되고 있다.
기존 산업단지도 변하고 있다. 구로·구미·창원 등 하나의 점으로 고립됐던 전통 산업단지는 그 단지 사이사이에 연결고리가 되는 소규모 단지가 생겨나면서 산업단지 대동맥을 만들기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위치한 기흥 지역을 중심으로 이천·천안·청주·음성 등지로 한국판 반도체밸리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국내 전자산업의 젖줄인 가전산업단지도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수원을 축
으로 광주와 창원으로 백색가전밸리가, 또 수원과 구미를 잇는 오디오·비디오(AV)밸리가 형성돼 재도약을 선언하고 있다.
당장은 아니지만 남북경협이 활성화될 경우 산업대간의 지류는 개성과 평양, 나아가 복원될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까지 뻗어 나갈 것이다.
따로 떨어진 두 점이 고립이라면 이를 잇는 선은 두 지점의 연결과 해방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이 왜 생겨났을까.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모든 전자업체들은 세계 어느 나라 업체와도 경쟁해야 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LG경제연구원의 권혁기 연구원은 『미국 동부의 산업단지를 잇는 대동맥, 실리콘밸리를 관통하는 고속도로 등 사회 인프라를 예로 들며 산업단지의 입지와 연결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세상 일과 상관 없이 제품만 잘 만들면 팔리던 시대는 지났다.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제품이나 서비스를 완벽히 공급할 수 있는 기업만이 살아 남는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협력업체와 더욱 긴밀히 협조해야 하며 협력업체도 모기업 등의 특정업체하고만 거래하던 시절은 지났다.
협력업체가 하나의 고리로 힘을 합쳐야 살아 남게 되면서 홀로 떨어져 있던 점들은 자연스럽게 선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지방도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방자치가 실시된 이후 지방자치단체도 생존을 위해 지역특성에 맞는 산업을 육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면서 네트워크화가 구축되고 있다.
이덕희 산업연구원 박사는 『전문적인 산업단지를 전국에 골고루 유치, 균형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덕희 박사는 그와 같은 예로 광주 광산업단지와 대구를 중심으로 한 패션 어패럴밸리(일명 밀라노 프로젝트)를 꼽는다.
『밀라노 프로젝트는 중앙정부가 기획하고 민간 자본이 참여하는 방법으로 연구기관·제조설비·학교·상가·문화공간이 집약된 산업단지를 목표로 섬유산업의 질을 한단계 높이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덕희 박사의 주장은 곧 선의 확장을 암시한다. 선들이 겹치면서 대단위 면적이 생겨나는 것이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이같은 자연 확대의 가장 전형적인 예다. 삼성전자의 기흥 공장과 현대전자의 이천 공장 주변에 몰렸던 장비·재료·부품 업체들은 호황을 계기로 신공장 건설 등 사세확장에 나섰고 중부권에 거대
한 반도체 밸리를 만들고 있다.
이같은 산업단지의 변화는 곧 개발독재 시절의 정부주도형 산업단지 조성이 이제 더이상 의미가 없음을 뜻한다.
구로에서 창원까지 거의 모든 산업단지는 박정희 정권시절 만들어졌다. 산업단지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서로 다른 업종이 한데 몰려 있을 뿐 나름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다.
최근 들어 영향력 있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그 단지의 성격이 바뀌었으며 덩달아 그 단지에는 해당 협력업체들이 집중적으로 모이게 됐다.
김정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지금까지의 산업단지가 중공업 기반의 정부 주도형 대규모 공업단지의 성격이었다면 향후에는 온오프라인 인프라에 기반을 둔 디지털산업단지』라고 정의한다.
구미공단을 만들 당시 과연 누가 21세기 한국의 디스플레이단지가 될 것으로 예견했을까.
산업지도를 다시 만들자는 구호가 무색할 정도로 이미 자연의 힘에 비유되는 산업의 힘은 스스로의 체질을 조정하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이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다. 산업단지 대동맥건설에서는 첫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
선으로 연결은 됐지만 아직 그 고리가 약하다. 하나의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나아가 대기업으로 커오는 역사가 우리 산업역사에 전무했기 때문이다.
덩치만 조금 커졌을 뿐 여전히 협력업체들은 중소업체라는 스스로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벤처밸리의 속성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대덕밸리도 이제야 안팎으로 디지털산업단지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택구 대전광역시 기업지원과장은 『지난해 말부터 대덕밸리내 제조업 기반 벤처기업 창업이 뚜렷한 증가세를 나타냈다』며 『대덕밸리내 자생적 발전을 고무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같은 증가세를 『연구단지 기능에서 생산시설과 행정, 주거, 레저 타운을 갖춘 대규모 산업단지화, 벤처 군수마트 유치 등을 통한 시장활성화 노력으로 변화하는 대덕밸리』로 풀이했다.
서울 디지털산업단지, 대덕밸리, 수도권 전문단지 등 산업지도를 다시 그리자는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정부의 산업정책도 이제 선을 더욱 뚜렷하게 하고 면에 색깔을 입히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제는 북녘까지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 국가 기간산업 육성이라는 대전제에 민간기업의 요구까지 버무리는 그런 그림 말이다.
<김인구기자 cl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