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인 더 뉴스>한국전자통신연구원 정선종 원장

정선종 원장은 늘 여유가 있다. 조급하지 않고 태연자약하다. 결코 서둘거나 무리하거나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무게가 느껴진다.

가끔은 그런 여유로움이 거만하게 보일 때도 있다. 카리스마라는 말과 거만하다는 말은 일맥상통한다. 이 둘은 결코 상황에 따라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다.

187cm의 큰키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정부출연 기관장 중에서 가장 큰 키다. 성큼 성큼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걸음걸이가 연상된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그가 큰일을 냈다. 퀄컴과의 CDMA 기술료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국내 기업기관이 외국 업체와 로열티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로 평가된다. 더욱이 지적재산권 관리의 귀재라는 퀄컴과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그것이었다.

고작 분쟁이라고는 덤핑 판정대상에 올라 백전백패해온 우리나라로서도 매우 의미있는 기술전쟁에서의 승리다.

정 원장의 도전은 사실 무모했다. 주변에 있는 연구원과 법률가들도 외국과 지적재산권 분쟁에서 승리해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퀄컴과의 싸움은 그만큼 힘들 것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퀄컴과의 기술료 분쟁은 국내 정보통신기업들에게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기술료 분쟁에서 승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대에 지적재산권의 의미, 연구개발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선종 원장의 퀄컴스토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파트너」와 「경쟁자」 퀄컴의 두 얼굴=퀄컴사는 ETRI와 CDMA 공동연구개발전인 91년 3·4분기 매출액 8990만달러에 불과한 작은 회사였다. 그나마 840만달러의 손실로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였다. 매출 대부분도 업무용 차량 트럭통신시스템에서 발생하는 별볼일없는 벤처기업의 하나였다.

퀄컴은 ETRI와 CDMA 공동연구개발에 성공하면서 급성장했다. CDMA 상용화 국가인 국내업체에 95년부터 2000년 6월말까지 징수한 6억5000만달러의 로열티가 종잣돈이 됐다. 여기에 CDMA 라이선스 수입 및 MSM 칩 등 핵심부품 판매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다.

미국 나스닥에서 퀄컴의 주가는 전례없이 급등, 금년 3·4분기 기준 자산 규모가 7조원에 이르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ETRI와 퀄컴 간에는 CDMA 상용화 성공에 따른 별도의 계약이 체결돼 있었다.

연구비 1695만달러와 국내 지정생산업체인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전자, 맥슨전자로부터 CDMA 단말기 및 장비의 국내 판매분에 대해 징수하는 기술료 20%를 매년말 45일 이내에 ETRI에 지급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

퀄컴은 국내 지정생산업체들로 부터 거둬들인 기술료를 96년 첫해에는 계약조건대로 정확히 지급했다.

그러나 퀄컴은 이듬해부터 전자통신연구원을 배반했다.

『퀄컴은 기술료 규모가 커지자 97년부터 일방적으로 기술료 배분대상 범위에서 PCS를 제외했습니다. 셀룰러의 경우에도 근거자료 제공없이 국내 업체로부터 징수한 기술료 총액의 11%만을 일방적으로 지급했습니다. 지급규모가 커지니 손쉽게 내주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ETRI와 퀄컴 간의 기술료 배분 대상범위, 배분기술료 산정방식을 둘러싼 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ETRI는 기술료 배분 대상범위에 셀룰러, PCS및 무선 PABX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한 반면 퀄컴은 셀룰러에 한정지었다. 배분기술료 산정방식에서도 입장차이가 났다. ETRI가 세금을 제외하기전 총 기술료를 기준으로 산정하자고 주장하자 퀄컴은 각종 세금을 제외한 순기술료를 기준으로 산정하자고 대응했다.

퀄컴사의 기술료 배분 의무 종료시기도 달랐다. ETRI는 퀄컴사가 국내 지정생산업체로부터 기술료를 징수하는 한 유효하다는 주장을, 퀄컴은 공동개발합의서가 종료됐음으로 기술료 배분 의무가 없다고 맞섰다. 공동개발합의서를 무시한 퀄컴의 주장이었다.

기술료를 둘러싼 분쟁이 일자 ETRI는 97년 11월 이동통신 기술연구단장을 반장으로 하는 퀄컴사 특별 대책반을 구성해 퀄컴사의 일방적인 기술료 배분행위에 대해 대응을 시작했다. 98년 1월에는 대책반이 미국 샌디에이고 퀄컴 본사를 방문해 ETRI의 입장을 전달했다.

◇기술료 분쟁 법정비화=퀄컴은 ETRI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98년 3월 10일 퀄컴사는 서면을 통해 기존 주장뿐만 아니라 ETRI에 대한 기술료 배분의무 자체가 종료됐다는 주장을 엉뚱하게 내놓기 시작했다.

정선종 원장은 퀄컴에 대해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을 할 것을 결정, 퀄컴사 특별대책반 반장을 맡으면서 직접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국내외 법률회사를 통한 법적 대응이 정원장이 선택한 카드였다.

98년 10월 14일 미국 현지 대리인 사무소에서 정 원장 주재로 회의를 열어 국제 중재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10월 23일 ETRI는 대리인을 통해 국제상공회의소 국제중재법원에 퀄컴사를 「CDMA 공동개발합의서 위반」으로 중재를 신청했다.

퀄컴은 이런 움직임에 대해 대형소송전문법률회사, 국내 최대 법률회사 등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막강한 대응반을 구성했다.

『과거 CDMA자료를 모으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흩어진 관련 개발자들을 찾아 자문을 구하고 과거 문건들을 재확인하는데 휴일조차 없었습니다.』

퀄컴은 ETRI가 법원 중재신청에 나서자 더욱 강경해졌다. 그 내용은 퀄컴이 국제상공회의소에 제출한 중재신청서 반박자료에 잘나타나 있다. ETRI에 이미 지급한 기술료 배분금 마저 반환하라는 폭탄선언이었다. ETRI는 미국 현지 대리인을 통해 퀄컴사가 제출한 반박서에 대한 답변서를 통해 합의서 원칙을 지키라고 거듭 주장했다.

99년 8월 20일 재판이 시작됐다.

『재판과정은 1년반가량이 소요됐습니다. 양사간 증거자료, 추가자료 제출, 퀄컴사의 자료 제출 거부에 대한 핵심쟁점자료에 대한 중재조정신청, 기술전문가 증인선정, 재무전문가 증인 선정이 계속됐습니다.』

가장 중요한 청문회가 금년 7월 5일부터 13일까지 샌디에이고에서 열렸다. 이곳에서는 ETRI, 퀄컴사 측의 변호인단간, 증인간, 기술전문가간, 재무전문가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청문에서 ETRI는 기술료 배분대상범위, 배분기술료 산정방식, 기술료 배분 종료시점을 증거할 중요한 1만8000페이지의 서류를 제시해 승기를 잡았다. 퀄컴은 이보다 많은 39만페이지 분량의 자료를 법정에 제출했지만 공동개발합의서 내용을 번복할만한 문건은 나오지 않았다.

『지난 12월 6일 결과가 나왔습니다.

셀룰러 뿐만아니라 PCS, 무선PABX에 대해 세금공제전 총 기술료 20%를 국내업체로부터 기술료 징수종료시점까지 지급하라는 판결이 난 것입니다.』

여기에 한가지가 첨부됐다. 국내 지정생산업체 4개사 뿐만아니라 비지정생산업체의 국내 판매분 기술료에 대해서도 20%의 기술료를 배분받을 권리를 얻어냈다. 이례적으로 퀄컴사가 연구원의 중재비용, 법률비용 모두를 지급하도록 하는 결정마저 이끌어 냈다.

퀄컴의 참패였다.

그러나 정 원장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제상공회의소 중재법원 판정을 퀄컴사가 이행을 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국내와 미국법원을 통해 명령의 집행승인 판결, 확인명령 절차를 밟는 과정이 남았기 때문이다.

『저는 퀄컴의 참패로 보지 않습니다. 퀄컴과 연구원은 기술개발 파트너입니다. 양기관의 능력을 활용하면 차세대 이동통신기술분야에서 세계 선두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 원장의 겸손한 맺음말이다.

<김상룡기자 srkim@etnews.co.kr>

약력

1943년 광주 출생

1960년 광주일고 졸업

1964년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 학사

1969 미국 사우스다코다주립대 전자공학 석사

1976 미국 펜실바니아주립대 전자공학 박사

1969-1972년 미 콘트롤데이터사 개발센터 근무

1976-1982 미 NASA 휴스톤 죤슨 우지기지 책임연구원,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개발 참여

1983-1998 한국전자통신연구원ISDN 연구부장, 컴퓨터개발단장, 위성통신기술연구단장

1998-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원장

1994-1998 국제기구 APSCC(아·태위성통신협의회) 회장

1999-현재 대덕연구단지 기관장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