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의 현장을 가다>36회-HP연구소 양자과학연구부

◆오늘날 정보사회를 견인한 지난 20세기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반도체기술이었다면, 오는 100년간 세상을 지배할 기술은 무엇일까. 「무어의 법칙」이 「한계상황」에 임박한 지금, 인류가 꿈꾸는 대안은 바로 미래형 컴퓨팅기술이다. 손톱만한 크기의 반도체 성능에 놀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는 「더 작으면서도 능력이 뛰어난」 컴퓨터에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착용하거나 몸의 일부로 삽입할 수 있는 웨어러블컴퓨터, 현재로선 한계가 있는 기상변화에 대한 예측을 정확히 해낼 수 있는 미래형 컴퓨터는 그리 멀지 않은 시간내 우리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노기술과 양자역학 덕분이다.

최근 미국 부시 행정부의 산업정책 수장으로 임명된 셰릴 세이버 상무차관은 『나노기술이 21세기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현대물리학의 진수로 꼽히는 양자역학과 나노기술은 현재의 반도체 집적기술을 획기적으로 끌어 올려 미래형 컴퓨팅을 구현할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에 본지 취재팀은 양자역학을 이용해 미래형 컴퓨터 구현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휴렛패커드(HP) 연구소 양자과학연구부, NIST 퀀텀컴퓨팅연구팀, 스탠퍼드대 전자공학부의 나노기술 연구팀을 방문, 총 4회에 걸쳐 미래형컴퓨팅의 미래를 가늠해 본다. 편집자◆

1959년 한개의 트랜지스터에서 출발한 실리콘 집적회로 기술은 3년마다 4배씩 집적도를 높여온 소위 「무어의 법칙」에 순탄하게 따라왔다. 이에 따라 40년이 지난 오늘 약 1억배의 집적도 향상을 달성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 확립된 실리콘 기술이 아닌 이와 전혀 다른 분자소자(molecular electronics)에 기반한 컴퓨터 기술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전자소자의 크기가 지수함수적으로 작아질 때 오는 20년후면 분자 수준의 크기로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에 CMOS 기술은 두가지 측면에서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하나는 단위소자의 크기가 20나노미터(㎚)에 이르게 되면 양자현상에 의해 소자 동작이 불가능하다는 기술적인 측면이고, 또 하나는 경제적인 문제다. 즉 반도체 생산라인 하나를 설치하는 비용이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해 2012년경에는 30조달러 정도에 이르러 반도체 시장 규모와 같아진다는 예측(무어의 제2법칙)이다.

이러한 점에서 HP 연구소 양자과학연구부의 분자소자 연구의 접근 방법은 매우 독특하다. 먼저 기술적인 한계로 작용하는 양자현상을 오히려 역이용, 분자소자를 택한 다음 제작생산의 경제성을 고려한 새로운 아키텍처(architecture) 및 공정개발에 착수했다. 나노미터 크기의 소자 및 회로를 저비용으로 제작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제작하는 종래의 톱다운(top-down) 방식의 제조방법보다 화학적으로 자발 형성(self-assembly, self-ordering)되는 버텀업(bottom-up) 방식이 유리하다.

그러나 이 경우 불가피하게 많은 불량 소자 및 배선성분이 생성되게 마련이다. 이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아키텍처를 개발하기 위해 HP는 테라막(Teramac:Terabit Multiple Architecture Computer)실험에 착수했다. 테라막은 FPGA(Field Programmable Gate Arrays)에 기초한 컴퓨터로 중복배선 개념의 아키텍처를 이용해 불량성분을 찾아내고, 이를 우회하도록 회로를 재배열한 뒤 프로

그램을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테라막의 성공 의미는 저비용으로 제작한 불량투성이의 집적 회로를 중복배선 및 이를 수정한 소프트웨어 기반의 컴퓨터 성능이 많은 비용을 들여 제작한 기존 컴퓨터보다 우수했다는 점이다. 종전에는 수조개 이상의 성분으로 구성된 칩을 하나의 불량도 없이 집적회로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특히 테라막은 앞으로도 1억배까지 집적이 가능하게 하는 나노기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리고 HP는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그림1과 같은 바둑판 모양의 배선과 스위치 소자로 이 새로운 개념의 아키텍처를 구현할 수 있는 하드웨어적인 설계도를 제안했다.

그후 그들은 차례로 구성성분 연구에 착수, UCLA의 헤스(Heath)그룹과 공동으로 지난 1999년 분자스위치 소자를 개발했는데 이는 순수한 양자역학에 기반한 연구였다. 그림2와 같이 분자의 한 부분을 전기적으로 자극하여 공명 관통(resonant tunneling) 상태와 절연 상태(tunneling barrier)로 전환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능한 기술이다. HP연구소는 또 지난해 실리콘 기판위에 화학적인 자발 형성방법으로 ErSi2 전도선 생성에 성공했다. 이 전도선의 크기는 높이와 너비가 나노미터 수준에, 길이는 수 마이크론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들은 분자컴퓨터 칩을 향한 설계도와 구성요소들에 관한 준비를 끝낸 셈이며 이제는 본격적으로 집적해야 하는 단계다.

이러한 연구는 적어도 10∼15년의 기간을 두고 여러분야의 전문가들이 합심해야 하는 기초 연구다. HP연구소의 윌리엄스 박사를 주축으로 하는 양자과학연구팀은 물리, 화학, 재료, 전산, 전자공학분야의 전문가들로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단기적으로 2년후 간단한 메모리를 집적해 분자 컴퓨터를 구현에 첫발을 디딜 계획이다. 이는 CPU의 메모리 접속시간(access time)을 줄일 수 있는 대용량의 캐시 메모리의 역할로 PC의 부팅시간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스탠리 윌리엄스 박사는 『우리의 연구가 2010년경 실리콘 소자를 완전히 대체할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며 『실리콘 기술과 접목하여 중기적으로는 포화기에 접어든 실리콘 소자 기술을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함께 『우리의 연구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크기가 작은 휴대형 고성능의 PC나 저소비 전력 및 초대용량의 서버급 컴퓨터를 겨냥한 회사의 비전과 부합하기 때문에 경영진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래형 컴퓨팅의 현실화는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이다.

<팰러앨토=박재성 논설위원 jspark@etnews.co.kr 신혜선기자 shinhs@etnews.co.kr 이성재 ETRI기초기술연구부 책임연구원 sjlee@idea.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