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국내 정보기술(IT) 업계는 모처럼 「아름다운 뒷모습」을 잇따라 지켜봤다.
한국 전자산업의 「산 증인」인 강진구 삼성전기 회장(74)과 반도 체장비 및 벤처업계의 대부인 정문술 사장(63)이 지난 2일과 4일 각각 은퇴를 선언한 것. 한사람은 전문경영인으로, 또 다른 한사람은 오너로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겼다. 두사람 다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거목을 연상케 한다. IT업계가 두사람의 퇴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떠난 자리를 깔끔하게 치운 두사람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강 회장이나 정 사장은 앞으로 1∼2년 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강 회장은 고령이긴 하나 상징성만으로도 삼성 그룹 전체에 힘이 된다. 정문술 사장도 하락한 주가를 되살려놓고 떠나고픈 욕심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사람은 똑같이 후진 양상을 위해 미련을 버렸다.
강 회장은 건강상의 문제는 둘째로 하더라도 후진양성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그룹의 만류를 결국 뿌리쳤다.
정 사장도 영업실적과 반대로 떨어진 주가가 오히려 후임 사장에게는 좋은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보고 결단을 내렸다.
이러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시피 한 IT업계에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정 사장의 퇴진은 말썽 많던 벤처업계의 젊은 경영자들에게 떠나야 할 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귀감을 보여 주었다.
강진구 회장과 정문술 회장은 대조적이다.
40년 가까이 삼성 그룹에 몸담아온 강 회장이 초기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해왔다면 정문술 사장은 불혹의 나이에 공직에서 퇴출당해 한때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어렵사리 사업을 꾸려왔다.
언뜻 보면 두사람의 삶은 「온실의 화초」와 「들판의 잡초」에 빗댈 만하다.
너무나도 다른 길을 걸어왔던 두사람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두사람 모두 오늘의 한국 반도체 산업을 만든 주역이다.
강 회장은 삼성 반도체 신화에 초석을 쌓았으며 정문술 사장은 국내 반도체 장비 산업을 개척한 프런티어다.
두사람은 서로 마주친 적은 없다고 한다. 거대한 수요 업체와 일개 장비 업체의 사장이 만나기 힘든 수직적인 국내 전자산업 구조에서 만남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사람은 저마다 맡은 분야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척박한 한국 반도체 산업을 오늘과 같이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IT업계가 두사람의 퇴장에 대해 감상에 젖어 있다.
이 시점에서 두사람의 은퇴가 던지는 메시지는 과연 뭘까. 바로 세대교체다. 두사람은 국내 전자정보산업 1세대는 완전히 지나고 본격적인 2∼3세대 시대가 열렸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러한 세대교체는 이미 몇년 전 이헌조 전 LG 회장이나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의 은퇴에서 시작됐으나 이번에 강 회장의 은퇴로 세대교체가 매듭지어졌다.
정 사장의 은퇴는 이러한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기업과 벤처기업에서도 세대교체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신호탄으로 풀이된다.
대기업의 세대교체는 삼성 전자소그룹이 올초 단행할 인사에서 고스란히 확인될 전망이다.
앞으로 국내 IT업계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러한 메시지를 떠나 두사람의 은퇴는 그동안 많은 경영자들이 자리를 떠날 때 뒷말이 무성하기 일쑤인 국내 IT업계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강 회장과 정 사장은 「떠날 자리」를 앎으로써 앞으로 국내 전자산업과 벤처업계에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됐다.
업계는 두사람이 이러한 상징성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뭔가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지만 두사람은 머리를 가로저을 뿐이다. 정문술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저는 미래산업의 경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임직원들이 진짜 경영자이고 저는 이들을 위해 자문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미래산업을 위해 제가 할 것이 있다면 「진짜」 자문역일 것입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