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해 국민의 혈세에서 연구개발에 투자한 돈은 모두 3조5000억원 규모. 그러나 연구개발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지 못하다보니 대부분 투자가 분산되고 부처간 중복현상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민간기업이 「2∼3년 후 상품화」라는 확실한 목표를 갖고 연구개발비를 투입하는 것에 비하면 정부의 주인없는 연구비는 그럴싸한 제안서로 누가 차지하느냐가 연구개발 주체들의 목표로 나타나기 일쑤다.
정부가 과학기술 전담부처를 신설한 지 35년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이렇다 할 국가연구개발목표가 없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투자가 수출지상주의 시절에서 출발하는 등 기형적인 태생의 한계를 지녔다 해도 연구원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세기가 변해도 목표가 없다.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는 과학기술부가 2000년을 앞두고 내놓은 「과학기술 장기비전 2050」도 향후의 방향만 제시했을 뿐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아 그야말로 비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국가가 장기적으로 추진할 과학기술목표가 없으니 예산의 쓰임새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는 채 집행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렇다보니 국가연구과제를 대부분 담당하고 있는 출연연들도 구조조정 이후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출연금을 지원받아 출연연의 기관 특성을 살릴 연구과제가 매년 나눠먹기식으로 바뀌는가 하면 10여년을 끌어온 연구과제가 후속 연구비 없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국가 전체의 연구개발목표 없이 예산만 낭비한 대표적인 사례가 정부가 국책연구사업으로 추진해온 자기부상열차개발사업이다. 대덕연구단지내 한국기계연구원에 건물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서 있는 자기부상열차 시험노선에는 붉은 녹물이 가득하다. 220억원의 국민세금이 연구개발에 투입됐지만 기술개발에만 급급했지 개발 후 활용방안에 대한 정부내의 컨센서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방치돼 있다. 국책연구사업이라는 명분과 달리 연구과제 선정 초기부터 과기부는 물론 이를 실용화하는 데 나서야 할 건교부나 철도청 등 관련부처들의 활용계획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연구개발에 참여한 기업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정부차원의 계획된 활용방안이 없었으니 돈벌이만 생각하는 약삭빠른 민간기업들이 나설 리 만무하다. 뒤늦게 올해 약간의 연구비가 책정되기는 했지만 이는 정부가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연구소 관계자들이 예산부처를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닌 결과다.
자기부상열차가 거시적인 연구개발목표가 없었다면 대덕연구단지내에 있는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은 초기 연구소 설립 목적에만 급급해 출연연의 목표설정이 빗나간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12월 이후 고유가시대에 접어들면서 국민은 국가가 대체에너지 개발에 적극 나서줄 것을 기대했으나 이 연구소가 기관고유사업 등으로 올해 연구개발에 주력하겠다는 분야는 속을 들여다보면 환경규제 대응 에너지기술개발사업, 산업폐열을 이용한 발전시스템 등 전체의 약 70%가 간접적인 에너지 연구개발사업에 치중하고 있다. 정작 납세자인 국민이 바라는 태양에너지·풍력·조력 등 대체에너지개발사업은 기대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 특히 이 연구소가 미래에너지 확보사업으로 기관고유사업비의 30% 이상을 투입하고 있는 미래에너지사업의 경우도 복합CVD이용 다결정 규소박막 태양전지 개발, 차세대형 전기화학 축전기술 개발 등 기업이나 대학, 타 출연연이 개발에 나서고 있는 연구과제들이다.
자기부상열차개발사업과 에너지연이 국가가 제대로 연구개발목표를 설정하지 못한 사례라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정부예산 80억원을 들여 개발하다 지난 98년말 중단한 「휴먼로봇개발사업」은 연구소와 연구원들이 의욕만 앞세우다 예산만 낭비한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94년부터 개발에 착수, 98년 1단계 사업을 끝낸 휴먼로봇개발사업은 연구팀이 과기부의 국가중점연구개발사업의 하나로 「서비스로봇개발」사업에 착수하면서 후속연구과제가 공중분해됐다. 기초연구가 진행될 때 일본의 한 전자업체가 이미 두발로 걸을 수 있는 인간형 로봇을 발표, 출발부터 말이 많았다. KIST측은 휴먼로봇 개발과정에서 쌓은 기반기술들이 프런티어사업으로 추진중인 지능형 마이크로로봇사업이나 중점연구개발사업인 서비스로봇개발사업에 응용되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휴먼로봇시스템이 과연 극미세 정밀기술을 요구하고 있는 지능형 마이크로시스템에 얼마나 응용이 될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간사부처인 과기부의 고위관계자는 『그동안 정부의 간섭을 줄인다는 측면과 과학기술계의 창의적인 연구활동을 지원한다는 의미에서 핵심선도기술개발사업(G7사업) 등 대형 국책연구사업에 있어 각론적인 부문에서는 연구기획사업부터 과제선정 등에 전문가그룹의 의견을 그대로 반영해 왔으나 에너지·환경·정보소자·기계·소재 등 국가가 나아가야 할 총론적인 부문의 목표설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올해부터 발효되는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정부가 의무적으로 5년마다 국가과학기술기본계획을 수립해 시행하도록 되어 있는 만큼 산학연 등 연구주체들과 정부가 어떤 미션을 가져야 하는지 과제로 남아있다.
<정창훈기자 ch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