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으려면 대세를 따르거나 아니면 대세를 주도하라.」
처세술을 소개하는 책머리에 나올 만한 생존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 정보통신시장이다. 다른 산업에 비해 특히 기술 및 서비스 진화 속도가 빠른 정보통신시장에서 도태를 면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해당분야 기술에 대한 「대세」인 국제 표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앞장서 표준을 개척해야 한다.
이 때문에 시장이 형성되기 전 경쟁업체간 혹은 국가간 자신에게 유리한 기술규격을 표준으로 정하려는 각축전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표준을 확보한 자가 시장을 선점하고 시장을 선점한 자가 시장을 주도하게 된다는 것이 정글 법칙에 다름 아닌 정보통신시장의 「힘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블루투스가 바로 이러한 단계에 와 있다. 블루투스 표준은 크게 블루투스 SIG(Special Interest Group)가 주도하는 산업표준과 IEEE802.15 그룹에서 추진하는 기술표준으로 나뉜다. 블루투스의 기술개발과 시장 형성을 위해 구성된 통신, 컴퓨터, 네트워크 관련 유수 회사들의 협력체인 블루투스 SIG는 99년 7월에 버전 1.0 블루투스 규격을 발표했으며 그해 12월에 버전 1.0b를 발표했다.
한편 공식적인 국제표준 단체인 IEEE802.15 워킹그룹은 SIG와의 협력 하에 블루투스 규격에 근거한 국제표준으로 IEEE802.15.1 규격을 확정한 상태다.
◇국내 현황 =정보통신 산학연 관계자가 결성한 국내 협력체로는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 산하 무선 LAN연구반, 한국전파진흥협회(RAPA) 산하 블루투스산업협
의회, 전자부품연구원(KETI) 산하 블루투스연구회 등이 있다.
이들 단체는 정례모임이나 정기적인 워크숍을 갖고 블루투스 최신 규격에 관련된 기술 및 정보를 공유한다. 그러나 아직 초기단계라 활동이 미약하며 업체 주도의 단체 성격이 강한 편이어서 산학연 협력체에서 기대하는 시너지효과는 높지 않은 편이다. 국내 블루투스업체간 제품의 호환성(compatibility) 보장 등 「국내표준 정립」을 주된 활동 목표로 삼고 있다.
이밖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블루투스 표준화팀(팀장 박성수)이 블루투스 2.0과 3.0버전을 타깃으로 핵심기술을 연구 개발중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삼성전자 중앙연구소 강우식 팀장은 『민간기업뿐 아니라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참여가 아쉽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SIG 내 워킹그룹에 가입하고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블루투스 산업표준을 주도하는 블루투스 SIG나 기술표준을 추진하는 IEEE802.15 워킹그룹을 통틀어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업체나 연구기관, 학계의 참여가 전혀 없다는 게 강 팀장의 지적이다.
강우식 팀장은 『SIG가 이익집단의 성격이 강하고 블루투스 프로파일당 다양한 산업이 연관돼 있어 민간업체 단독으로 참여하기에는 워낙 벽이 많다』며 『국내 업체뿐 아니라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나 학계에서 각 워킹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IEEE802.15에도 모두 4개의 워킹그룹이 있다. 개인별로 등록해 참여하는 각 워킹그룹에도 세번 이상 참석하면 의사결정 권한이 주어지는 보팅멤버중 한국인은 없다. 보팅멤버 자격으로 이들 선진그룹이 추진중인 워킹그룹에서 한국에 유리한 새로운 안을 제시하거나 우리 입장을 적극 개진할 만한 여력이 없는 셈이다.
또 KETI 조진웅 팀장은 『블루투스 관련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KETI는 산자부 무선 PAN(Personal Access Network) 표준화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산자부로부터 프로젝트 추진비 명목으로 받은 연구비는 1년에 5000만원. 주문형 반도체 하나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 정도다. 인건비에 부품비, 연구개발비 등 드는 비용을 계산하면 현실적으로는 프로젝트 진행이 불가능하다. 업체 프로젝트나 기존 프로젝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수밖에 없다.
조 팀장은 『무선 PAN 표준화 국제동향이나 기술의 흐름을 파악하려면 미국 FCC에 가입해야 하지만 현재 예산으로는 가입비 500만원 조달도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 프로젝트라는 명함이 옹색한 형편이다.
<조윤아기자 forang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