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은 살아있다>(2)디스플레이-삼성SDI 부산공장

지난해 11월말 LG전자와 네덜란드 필립스가 컬러 브라운관(CRT)사업의 합작을 선언했을 때다. 사람들은 합작사가 세계시장 1위 업체로 우뚝 선다는 발표에 적잖이 놀랐다. 사람들은 또 이 합작사가 겨냥한 업체가 삼성SDI고 이 회사가 줄곧 1위를 지켜왔다는 것에 놀랐다.

세계 정상에 서 있으면서도 정작 국내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가 CRT산업이다. 브라운관이라고도 불리는 CRT는 전기신호를 전자빔으로 형광면에 쏘아 영상을 만드는 장치다. 컬러TV나 PC모니터의 핵심부품이다.

국내 업체로는 삼성전자와 LG전자 그리고 오리온전기가 있다. 세 회사는 연간 2억6000만개인 세계 시장의 36%(99년 기준)를 점유했다.

TFT LCD의 세계시장 점유율(37%)에 맞먹는다. LG전자와 필립스의 합작사를 국내 업체로 본다면 점유율은 무려 50%에 이른다.

이처럼 한국 업체들이 세계 브라운관 시장을 휩쓸고 있으나 국내에선 이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 제품이 아닌 탓도 있지만 반도체나 TFT LCD와 같은 화려한 성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찬사는커녕 마치 굴뚝산업의 대명사로 취급받기도 한다.

브라운관업계는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지난해 인터넷 바람이 거세게 불 때 CRT업체 사람들이 가장 신바람이 났다. 모니터용 브라운관(CDT)이 불티나게 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브라운관업체의 주가는 오히려 떨어지기도 했다.

삼성SDI 사람들은 속상한 게 하나 더 있다. 세계 최대의 브라운관 공장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삼성SDI 부산공장은 명칭과 달리 울산에 있다. 시의 서쪽 변두리인 삼남면이다. 생긴 지는 벌써 30년이 됐다.

처음에는 진공관을 생산했다가 흑백 브라운관과 컬러 브라운관을 거쳐 이제는 평면브라운관과 유기EL 등 평판디스플레이도 생산한다. 연면적 23만평의 부지에 모두 8개 라인을 가동한다.

브라운관 생산능력은 연간 1500만개다. 이 공장이 지난해 올린 매출액은 3조원을 웃돈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또 브라운관용 전자총도 생산해 6개국 8개 공장에 공급한다. 저가형 액정표시장치(STN LCD)와 진공형광디스플레이(VFD) 등 평판디스플레이 제품도 생산한다.

올 하반기에는 유기EL공장도 들어설 예정이다. 규모뿐만 아니라 내용도 알찬 공장으로 거듭나게 된다.

브라운관업체들의 요즘 고민은 수요부진에 따른 가격하락과 경쟁제품의 시장잠식이다. PC시장 위축으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CDT수요가 격감했다. 컬러TV용 브라운관(CPT)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나 역시 시장이 침체됐다. 이 때문에 브라운관업체들은 제조원가를 낮추는 데 여념이 없다.

삼성SDI 부산공장도 예외는 아니다.

부산공장은 올초 김순택 대표이사가 참석한 가운데 「다함께 DASH230」의 발대식을 가졌다.

앞으로 2년동안 매년 30%씩 생산효율을 높여 내년에 세전이익 3000억원을 달성한다는 경영혁신 활동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말 부산공장 간부들은 뒷산인 영취산 정상에서 목표달성의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사실 브라운관업계에서 이같은 경영혁신 활동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범용화한 부품으로 마진이 적어 원가구조를 혁신해야만 수익증대는 물론 투자여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부산공장만 해도 명칭은 달라졌지만 지난 93년 이후 끊임없이 혁신활동을 전개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상의하달식이었으나 이제는 노사 공동으로 일을 추진한다는 점이다. 올해부터 시작하는 경영혁신 활동에 「다함께」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최고경쟁력 확보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Yes I Can」 등의 슬로건이 공장 곳곳에 나붙어 있다.

가격하락은 브라운관업체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브라운관업체들은 정작 TFT LCD의 가격하락이 걱정스럽다.

브라운관은 지금까지 나온 디스플레이 가운데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화질은 우수한 디스플레이다. 그렇지만 경쟁제품인 TFT LCD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가격의 이점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 브라운관업체들은 완전평면과 와이드, 두께를 획기적으로 줄인 초슬림형 브라운관 등 혁신제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 제품은 부가가치도 높다. 삼성SDI 부산공장 개발실도 이러한 신제품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국내 브라운관업체들은 일본·유럽 등 선진업체와 대형제품에서, 중국업체와 소형제품에서 경쟁한다. 최근에는 중국업체들도 대형제품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브라운관업체들은 혁신운동에 못지않게 노사화합을 중시한다. 「마른 수건을 짜는」 혁신운동으로 노동자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 모 브라운관업체는 노조의 파업으로 생산에 큰 차질을 빚은 바 있다.

삼성SDI 부산공장은 지난 99년 노사합동 세미나를 시작으로 노사가 경영정보를 공유하는 신노사문화 정착에 매달리고 있다. 이같은 작업은 성공적이어서 지난해말 「대한민국 신노사문화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 돌입한 국내 브라운관업체에 혁신운동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특히 인건비가 싼 중국 등 후발업체의 추격이 맹렬하다.

브라운관업체들은 21세기에도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디지털 디스플레이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PDP·유기EL 등 새로운 디지털 디스플레이는 물론 기존 브라운관도 완전평면화해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려 한다.

외국업체와의 합작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LG전자는 필립스와 브라운관 사업에서, 삼성SDI는 일본 NEC와 유기EL분야에서 합작했다.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해 불안한 경영환경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전략이다.

삼성SDI는 그동안 이룬 브라운관 신화에 만족하지 않고 디지털TV 시대를 이끌어가는 또다른 신화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내놓은 슬로건이 「디지털세상의 진정한 강자」다.

부산공장은 이러한 삼성SDI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맨앞에 나선 「꿈 공장」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