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진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와 북한의 정책이 급변하고 있다. 북한은 올해부터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과 높이에서 보자」는 구호를 내걸고 신사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신사고 개념의 핵심에는 정보기술산업을 통한 새로운 경제발전 전략이 자리잡고 있다.
올해 남북한 관계가 급변하게 된 것은 지난 10년간 북한이 추구했던 생존전략이 실패했다는 자평이 중요한 원인으로 제기됐다. 북한이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한 양대 전략으로 추진했던 일본과의 수교 실패와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 실패는 결과적으로 북한경제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북한의 경제침체의 원인은 이러한 두 가지 전략의 실패 외에도 구소련·동구 경제권의 해체 및 경제협력 파트너의 상실로 인한 외부적인 자원 제약,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의 내재적 모순, 원자재·기술·자원의 만성적인 부족, 자연재해가 겹쳐 일어났다.
북한 지도부가 미국이나 중국·일본 등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교섭을 통해 경제지원을 모색했지만 성과는 매우 미미했고 이런 상황에서 북한지도부가 남한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 대한 인식변화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일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북한의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남북한 화해·협력 적극 추진이라는 대북정책 3대 원칙을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
대남정책과 대외정책의 변화는 북한의 경제발전 정책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북한은 지난 몇 년간 정보통신산업에서 활로를 찾겠다는 새로운 정책을 구상했다. 북한의 정보통신산업에 대한 관심은 오래됐지만 주력산업으로 육성, 이를 통해 경제회생을 하겠다는 전략의 수립은 최근의 일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때는 지난 99년이다. 이때 과학기술은 추상적인 차원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정보통신산업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제발전 정책 변화는 북한의 대남정책 및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5월 김정일 위원장은 18년만에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실리콘밸리인 베이징 소재 중관촌을 둘러보고 바로 한달 뒤에 남북정상회담을 하여 남한과의 관계를 일신했다.
2001년 1월의 상하이 방문은 김 위원장의 정보기술산업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중국 및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김 위원장의 발빠른 움직임은 바로 정보기술산업의 적극 추진을 위한 대외적 정지작업의 일환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남한과의 경협 및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한 북한의 남한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게 된 근본 원인이 남북경협을 원활히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포용정책의 구호하에 기업의 북한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대북지원 의사를 밝히고 있으며, 금강산관광사업을 통해 북한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주었던 만큼 북한은 대규모 경제지원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은 남한밖에 없는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한과 관계개선을 하는 경우 북한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개성공단에 대한 남한기업의 직접 투자, IT산업에서의 남북경협 외에도 남한 정부로부터의 식량과 비료 등의 직접적인 지원, 남쪽 민간단체로부터의 지원, 미국과 일본에 있는 교포들로부터의 지원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 기조는 올해에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과 남한은 적극적인 관계개선의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의 경제사정이나 미국의 대북정책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남한과 북한 당국간의 이해관계는 서로 합치하고 있으나 외적인 요인들이 부정적인 장애요인으로 잠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남북한 당국이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있는 한 남북관계의 신뢰성은 유지될 것이다.
북한은 이제 과학기술 발전과 첨단산업 육성을 통해 경제를 회생하는 것이 사상동요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길임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즉 내부체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외자·기술·원조 획득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방국가와의 국교수립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남한과의 관계정상화에도 적극적이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은 과거 체제보장 등 정치적 목적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제 북한은 자본·기술·원조 등 경제적인 동기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이 정보통신기술을 주력산업으로 한 산업화를 결심한 것이 대외정책에서의 급격한 변화와 관련이 큰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자력갱생 전략은 북한 혼자의 힘으로 가능했으나 IT산업은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야심찬 변화 의지에도 불구하고 장애요인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개혁의 의지가 아직도 너무 미약하다는 점이다. 체제의 개혁이 없이 외부의 수혈을 통한 경제회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북한의 개혁의 의지를 아직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주변국의 호응이 미흡하다. 특히 미국의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이 중요한 장애다.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북한의 개방정책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교착상태에 있는 동안 남북간의 경제협력, 특히 중소기업의 대북진출은 오히려 더 활성화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과 일본이 수교문제에 걸려서 지난 시기의 정체를 지속하고 있으며 대기업들이 자금난과 국제관계의 눈치를 보고 있는 사이에 중소기업들이 파고들 수 있는 틈새는 더 넓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