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피아>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

배식한 지음, 책세상 펴냄

월드와이드웹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사용 양식과 사회 문화적 영향을 다룬 이 책은 4×6배판에 200페이지 미만의 소책자이지만 인터넷이 우리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폭넓고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말 그대로 「질이 양을 압도하는 역작」이다.

저자는 책의 서론에서 인터넷의 구성물에 해당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기초 개념을 간결히 소개한다. 마디(node)라는 메시지 단위들이 끈(link)을 통해 다중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하이퍼텍스트는 서론-본론-결론과 같이 위계적, 순차적으로 배열되는 전통적 형태의 글과는 구성 방식이 판이하다. 하이퍼텍스트는 전통적 텍스트에 비해 소재가 다채롭고 풍성하다. 하지만 구성이 지나치게 불확정적이고 혼돈스럽다는 취약성도 갖고 있다.

컴퓨터를 활용한 하이퍼텍스트 소설의 효시로는 1987년 발표된 마이클 조이스의 「오후(Afternoon)」가 꼽힌다. 이 소설의 독자는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대신, 스토리 스페이스에 진열되어 있는 상자들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열어 소설을 만들어 읽어야 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소설의 독자는 작가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넓은 공원을 관류하는 다양한 소로들을 발길 닿는 대로 유랑한다. 하이퍼텍스트 문서를 「읽는다」고 하지 않고 「항해한다(navigate)」거나 「배회한다(browse)」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논리구조가 명료한 전통적 서사양식에 대신해 다양한 마디들이 무질서하게 연계되어 있는 하이퍼텍스트가 최근 각광을 받고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결정적 계기는 다중적 접속이 가능한 컴퓨터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보다 근본적 원인은 번다한 생각들이 교차하는 우리의 일상적 사고과정이 바로 하이퍼텍스트의 전개양식과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이퍼텍스트의 발전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미국과학연구개발국장 배니바르 부시의 논문 「마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As We May Think)」이라는 논문으로 소급된다. 「자유분방한 연상을 허용하는 기구」의 출현 가능성을 시사한 부시의 주장이 알려진 이후 실제로 다양한 시스템들이 개발되었다. 「세계(World) 만방을(Wide) 거미줄처럼(Web)」 연결하는 월드와이드웹은 그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끝도 시작도 없는 영원한 마디의 미로」인 하이퍼텍스트에서 마디와 마디를 잇는 끈은 마치 모래바람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사막의 길과 같이 무상하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는 파피루스의 출현 이후 반만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동안 지속되어온 독해법과는 판이한 비(非)순차적 글읽기를 요구한다. 특히 컴퓨터가 확산되면서 언제 어디서든 임의적으로 삭제·수정·편집할 수 있는 글쓰기가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획선적·순차적 글읽기 방식은 도전받기 시작했고 「선(line)의 횡포」에 의해 억압받아왔던 자유로운 연상들은 하이퍼텍스트의 세계에서 소생하고 있다.

저자는 하이퍼텍스트 공간에서 작가와 독자는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까닭에 기념비적 저작, 위대한 고전 혹은 불멸의 명저 등의 존속 가능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컴퓨터는 「다음에 무엇을 읽겠느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이야기는 오직 독자의 주관적 선택을 통해서만 전개될 뿐이다. 신문, 방송, 잡지 등에서는 어느쪽 길이 유익할 것인지에 관한 메타-하이퍼텍스트적 정보를 제시한다.

이처럼 확장된 사용자의 자유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저자는 수직적 사고를 지양한 수평적 이해를 촉진할 수 있는 「자아의 소멸」을 제안한다. 중심없는 시대에 중심을 갖고 살려고 노력하기보다 마음을 비운 무아지경을 지향하는 것이 선택적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관건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하이퍼텍스트도 텍스트의 일종이고 인터넷도 글읽기 공간이라면, 탈(脫) 중심적 경험 세계를 주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식능력의 계발이 보다 절실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한동안 기성세대는 자녀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책을 읽으라고 야단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정보화 물결이 확산되고 있는 이즈음에는 PC를 들여놓고 고속 통신망을 깔아주면 자녀들의 학습조건을 완비시켜준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정보의 바다」로 표현되는 인터넷 세계는 스스로 헤쳐나아가야 할 망망대해다. 음란·퇴폐·폭력·비리의 도전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올바른 길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독도법을 연마할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전통적 글읽기에 의존한 독서가 첩경이라는 점을 저자는 이 책에서 역설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고려대 김문조 교수 pkim82@hotmail.com>